[이준기의 D사이언스] "기계산업에 AI·디지털·서비스 접목 K-머신 구현해 신제조 강국으로"
1990년대 산학연·전문가 원팀 협업
'초초임계압' 국산화 실증플랜트 건설
공로 인정… 첫 민간출신 기계연 원장
기계산업 위기 발판… 'FBO' 도약
디지털·AI와 함께 경쟁력 제고 총력
지능 플랫폼·솔루션 개발로 초격차
"세계 이끌 연구 분야 '첨단로봇·수소'
韓 옵티머스AI 제작… 대표 제품 제안"
이준기의 D사이언스 류석현 한국기계연구원장
기계 하면 떠오르는 선입견이 여지없이 깨져 버린다. 딱딱하고 차가운 기계적 이미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30년 넘는 세월을 기계와 함께 했음에도 그는 전혀 기계스럽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따뜻함과 배려에서 풍겨져 나오는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연신 고개가 끄덕여진다. 국내 기계산업의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그의 혜안과 식견 속에 기계·제조강국 코리아로 나아가기 위한 레시피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했다.
류석현 한국기계연구원장은 지난해 12월 취임 이후 기계에 AI와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K-머신(Machine)'을 선도하는 데 혁신 역량을 모으고 있다. 그가 내걸은 K-머신은 디지털·AI·서비스 기술을 접목해 제조혁신의 기반이 되는 기계·장비·솔루션을 구축하는 것이다.
류 원장은 "기계연이 K-머신을 선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면 세계적인 종합연구기관으로 도약할 수 있고, 그게 실현되면 우리나라가 신제조 강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취임하자마자 디지털에 강한 연구조직으로 리빌딩하고, 반도체장비연구센터, 액체수소플랜트연구센터, 첨단로봇연구센터, 산업기계DX연구실 등을 신설했다. 학제와 기능 중심의 연구조직도 임무와 제품 중심으로 개편하고, 인력 역량 강화를 위한 인재개발실과 미래 우수 인재 양성을 위한 'KIMM 스쿨'을 새롭게 갖췄다.
대담=이준기 ICT과학부장
류 원장은 "우리를 빠른 속도로 쫓아오는 후발국과 우리보다 앞선 선도국을 넘어서기 위해선 초격차 R&D와 디지털 결합을 통한 기계산업 전반에 걸친 대개조가 필요하다"며 "디지털 결합과 초격차 R&D를 통해 자율제조를 얼마나 빨리 실현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될 것"이라고 말했다.
자율제조는 AI와 로봇을 접목한 지능화된 공장을 의미한다. 인구 고령화와 학령인구 감소 등에 따른 제조 현장의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는 돌파구가 돼 우리나라 기계산업의 미래 경쟁력이 될 것이라는 게 류 원장의 주장이다.
그는 "디지털 전환과 탄소중립의 거대한 파고 속에서 첨단 로봇과 수소 분야에서 세계 최초, 세계 최고, 세계 유일의 기술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서 테슬라의 AI 휴머노이드 로봇인 '옵티머스'를 언급하며 "궁극적으로 AI·디지털이 로봇과 결합해 'AI화된 로봇'이 미래 기계산업 생태계를 이끌어 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기계연을 비롯해 ETRI, KIST, 생기원 등 출연연이 협업해 '한국판 옵티머스'를 만들어 국가와 사회에 기여했으면 한다"고 피력했다.
◇대기업서 연구자로 첫 발…'고효율 화력발전시스템' 상용화 주도
류 원장은 여느 출연연 원장과 달리 대기업(옛 두산중공업, 現 두산에너빌리티)에서 연구자로 첫 발을 내디뎠다. 퇴직할 때까지 화력발전소의 고효율·친환경을 구현하는 '초초임계압(USC) 시스템' 개발에 전념해 왔다. 이를 위한 연구과제 기획부터 개발, 상용화 등 전 과정에 15년 동안 참여해 실증 플랜트까지 건설하는 대형 연구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그는 "1990년대 후반 초초임계압 프로젝트를 산학연관 전문가들과 원팀을 이뤄 기획부터 건설까지 전 주기를 완성하는 데 15년이 걸렸다"며 "이런 장기 대형 프로젝트를 경험하면서 제대로 된 R&D 성과가 나오려면 최소 10년 이상의 긴 시간을 투입해야 하고, 산학연관 협업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체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15년 간에 걸친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초초임계압 발전시스템 국산화를 통해 국내에 1000㎿급 실증 플랜트를 건설할 수 있었고, 국내외 시장에서 약 5조 원에 달하는 사업을 수주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적은 연료를 투입해 온도와 압력을 임계점 이상으로 높여 화력발전소의 효율을 최대로 끌어 올리면서 오염물질 배출은 최소화할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초초임계압 화력발전소 실현에 기여한 것이다.
◇대형 프로젝트로 출연연과 인연…산학연 전문가로 변신
기업 R&D에 몸담고 있었던 류 원장은 현장에서 겪는 기술적 어려움을 한국기계연구원과 같은 출연연의 도움을 받아 해결할 수 있었고, 과제 공동수행으로 출연연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는 "당시 기업이 국내 기계산업 생태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사실상 생태계의 최정점에 있었음에도 출연연의 기술 지원과 연구 협력을 통해 우리나라 기계기술의 국산화와 기계산업 성장을 가속화할 수 있었다"며 "이 과정에서 기계연을 비롯해 KIST, 재료연, 에너지기술연, 전기연, 항우연, 원자력연 등 여러 출연연과 협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출연연의 연구기획, 평가, 자문 등 산업체를 대표하는 멤버로 활동하면서 출연연과의 접점을 한층 넓혀갈 수 있었다. 이후 대학 산학협력 교수를 거쳐 지난 2021년에는 국가연구소대학인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의 산학협력단장으로 옮기면서 출연연과 인연은 더 깊어지게 됐다.
UST 산학협력단장을 맡으면서 30년 넘게 대기업 R&D 분야에서 쌓아온 경험과 역량을 출연연 중심의 산학연 협력 활성화에 기여하는 산학연 협력 전문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이런 그의 활동을 높게 평가받아 지난해 12월에는 민간 기업 출신 처음으로 기계연 원장이 취임했다.
◇"디지털·초격차로 기계산업 대개조"…'자율제조', 미래 경쟁력 좌우
류 원장은 기계산업의 혁신은 디지털과 인공지능(AI)을 통해 가속화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디지털과 초격차에 방점을 찍고 기계산업 경쟁력을 끌어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한민국 기계산업의 미래는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중국과 인도, 베트남, 멕시코 등 후발 주자들의 추격이 매섭고, 독일과 일본, 미국 등 선도국들의 혁신 역량을 우리를 능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나라가 기계산업의 위기를 새로운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초격차 R&D와 디지털 융합은 필수불가결하다고 강조했다.
류 원장은 "초격차는 기술적 관점에서 경쟁 상대에 비해 한 두 세대 앞선 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상대의 추월을 허락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며 "우리가 기계산업에서 초격차를 실현할 수 있는 분야는 자율제조와 가상공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AI, 로봇의 융합으로 기계 하나 하나에 지능을 부여하고, 지능화된 기계로 구성된 제조 라인과 공장이 지능을 갖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지능화된 제조와 공장이 지역과 국가를 넘어 연결될 수 있도록 플랫폼과 솔루션 개발에 역량을 집중해야 자율제조와 가상공학 기반의 기계산업 초격차를 확보할 수 있다는 구상을 내놨다.
류 원장은 취임 이후 지난 6개월 간 '우리나라 신제조 강국 도약'을 실현하기 위해 세계관, 비전, 경영목표 등을 마련해 구성원들의 이해와 자발적 실천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산학연 협력, 보다 밀도 높게… '기업이 밀고, 대학이 당기고'
그는 서로 지향점이 다른 출연연 R&D와 기업 R&D을 경험하면서 산학연 어느 혁신 주체도 단독으로 생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됐다. 더욱이 과학기술과 산업 전반에 디지털 전환이 가속화되고, 글로벌 기술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이전과의 산학연관 협력으론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산학연관 협력은 구색만 갖췄을 뿐, 시너지 측면에서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겉돌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류 원장은 "과거에 비해 산학연 협력 필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면서 "인력양성을 위한 수요와 공급 관점에서 대학과 기업의 괴리가 큰 게 결정적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기업은 실무에 투입할 인력을 대학이 양성하지 못한다고 책임을 대학에 돌리고, 대학은 반대로 기업이 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을 하지 않고 쓸 인력이 없다고 불평불만한 하며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기업과 대학이 인력 수요·공급에 있어 미스매칭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기업이 먼저 원하는 인재상을 대학에 제시하고, 대학이 기업의 지원을 받아 기업에 최적화된 인력을 양성하는 산학 간 상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산학연 활성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거버넌스 재정립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류 원장은 "기업 최고경영자, 대학 총장, 연구기관 주요 인사 등이 참여해 산학연 활성화를 논의하는 정부 차원의 새로운 거버넌스가 필요하다"며 "산학연관 협력은 우리나라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을 위한 강력한 혁신 엔진이자 미래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로봇·수소로 승부수… "출연연 모여 '한국판 옵티머스 AI 로봇' 만들자"
류 원장은 세계 최초(First)·세계 최고(Best)·세계 유일(Only)을 아우르는 이른바 'FBO'가 될 연구 분야로 첨단 로봇과 수소를 꼽았다. 그는 "AI와 디지털 기술이 점점 고도화되면서 최종적으로 AI와 로봇이 만나 '인공지능화된 로봇'이 미래 기계제조 산업의 게임 체인저가 될 것"이라며 "70여 명의 로봇 연구자를 보유하고 있는 기계연을 중심으로 KIST, ETRI, 생기원 등 출연연이 함께 '한국판 옵티머스 로봇'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옵티머스 로봇은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테슬라가 최근에 선보인 AI 인간형 로봇이다. 사람처럼 자연스러운 보행과 손가락을 이용해 물체 조작이 가능해 공장 내 작업부터 가사 도우미까지 다방면에 활용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류 원장은 "옵티머스와 같이 앞으로 인간 능력을 뛰어넘는 AI가 장착된 휴머노이드 로봇이 미래 로봇시장을 선도하며 다방면에서 널리 쓰일 것"이라며 "로봇을 연구하고 있는 출연연들이 역량을 모아 AI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한다면 '출연연 대표 상품이자 브랜드'로 국민들에게 더욱 다가서게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기계연은 수소 밸류체인에 있어 공급기술의 가장 큰 축인 액화수소플랜트 실증과 액화수소를 저장·활용하는 액화수소 공급시스템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의 수소경제 사회를 앞당기기 위한 연구에도 주력할 계획이다. bongchu@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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