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경영, 경영자의 삶은 책임이다 [한경에세이]

2024. 6. 27.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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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우 마이다스그룹 회장·마이다스아이티 최고인사책임자(CHO)

한 해를 마무리하는 연말 모임에서 누군가 물었다. “만약 살면서 쌓아온 지식과 지혜를 그대로 가지고 20대로 돌아가 다시 살 수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자리에는 사회적으로 꽤 큰 성공을 거둔 이들도,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놀라웠던 것은 성공한 사람들의 답변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반면에 성공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던 이들은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며 다시 돌아가 열정을 불태우며 살아보고 싶다고 답했다.

성공에 대한 우리 사회의 보편적 통념에 비추어 볼 때, 성공적인 삶을 산 이들은 상대적으로 더 큰 만족과 기쁨, 보람을 느끼며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그 삶의 재현을 반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었다.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아슬아슬하게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위태로운 날들이 많았습니다.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이미 성공 가도에 올라선 이들은 대개 자신이 가진 에너지와 능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전속력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다. 매일 매 순간 치열하게 살다 보니 그 과정이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성공으로 얻은 보상은 무지개처럼 공허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돌아가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고 말했다. 실제 경험을 통해 볼 때도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만족스럽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는 않다. 이는 기업 경영자든, 정치인이든, 대학 교수이든 모두 마찬가지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성공을 추구한다. 하지만 성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행복은 찰나처럼 짧고 힘듦은 너무나 길다. 매일매일 힘겹게 사투하며 성공을 향해 나아가지만, 행복은 바람처럼 왔다가 사라질 뿐이다. 행복은 그저 꿈꾸고 추구할 수 있을 뿐 실재하지 않는 파랑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성공은 무지개이고 행복은 파랑새일 뿐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까?

 희망의 역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좋은 인생을 살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귀결된다. 성공과 행복에 대한 갈구와 더불어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전 인류의 공통된 고민이면서 내 평생의 화두이기도 했다. 삶의 본질에 대한 고민은 인간 정체성의 탐구로 이어졌고, 그 탐구의 여정에서 가장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준 것은 ‘빅 히스토리(Big History)’였다.

빅 히스토리는 마치 우연과 필연이 씨줄과 날줄로 직조되며 엮어내는 한 편의 장대한 다큐멘터리와 같다. 이 장대한 다큐멘터리 안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일까? 광활한 우주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인간은 물질의 조합으로 이뤄진 극히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우주 질서의 거대한 메커니즘에 따른 알고리즘에 의해 존재한다. 우리가 만나고 사랑하고 나누며 살아가는 이유도 물리 법칙에 기반한 생물학적·신경과학적 메커니즘 때문이다. 당연히 인생도 사회도 그 맥락적 연장선에서 작동된다.

이른바 ‘결정론’이다. 우주의 알고리즘대로 작동하는 결정론의 세상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허상에 불과하다. 여기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결정된 운명의 극본대로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에 불과한 것일까?’라는 물음이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스스로 자유로운 의지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살아왔다고 여기게 한다. ‘우리는 운명의 강물에 속수무책으로 떠밀려 갈 수밖에 필연적 존재인가, 아니면 자신의 의지로 삶을 자유롭게 개척하고 만들어가는 자의적 존재인가?’ 이는 결정론과 자유론의 오래된 딜레마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오늘날 양자역학에 기반하여 과학이 내놓은 모범답안은 ‘자유의지적 결정론’이다. 즉 세상은 거대한 우주적 질서에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는 그 질서 안에서 자의적 결정권을 가지고 판단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소위 ‘양립론’으로 알려져 있는 절충안이다.

인간은 세상의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관계와 상호작용에 따른 창발, 적응, 축적을 통해 ‘자기형성적’으로 만들어졌다. 창발, 적응, 축적의 과정은 인간이 물질에서 생명으로, 그리고 다시 의식을 가진 존재로 진화한 과정과 맞물려 있다. 먼저 생명의 탄생 자체가 무생물인 유기물질들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일어난 창발의 사례다. 이후 생명체는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선택을 통해 유리한 형질이 축적되었다. 그리고 적응 형질이 맥락적으로 축적된 결과 뇌의 복잡성이 증가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이 발달하면서 인간의 의식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자기형성적 진화 과정을 통해 인간은 외부 환경의 자극에 반응하고 적응하는 수동적 객체이면서 동시에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능동적 주체로 존재하게 되었다. 우리가 결정론과 자유론을 오가는 이율배반적인 존재처럼 보이는 이유는 이처럼 수동적 객체이면서 능동적 주체라는 이중적 존재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 질서의 메커니즘에 따른 알고리즘으로 작동하는 수동적 존재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자전적 질서를 바탕으로 작동하는 능동적 존재로 진화했다. 하지만 우리를 능동적 존재로 작동하게 하는 근원에는 여전히 거대한 우주의 알고리즘이 자리 잡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복잡한 생화학적, 물리적 법칙에 따른 우리 몸의 생명 활동이다. 우리는 매 순간 호흡을 하고 신진대사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이러한 생명 활동의 근간이 되는 세포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느끼거나 인지하지는 못한다. 무의식의 심연에서 작용하며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만들어내는 신경과학적 메커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거대한 우주의 일부이며 그 메커니즘에 따라 부품처럼 작동하는 존재임을 자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우주의 알고리즘에 따라 작동하고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수동적 미물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주와 연결되어 부분이자 전체로 작용한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알고리즘으로 형성된 자기형성체이자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는 자전적 존재다. 우리는 자연과 유리된 존재가 아니다. 자연과 상호작용하며 자연의 일부로 살아간다. 우리는 우주의 알고리즘에 기반하여 형성된 내재적 알고리즘으로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작동하는 수동적 능동태로 작동하는 존재다.

우리가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기 위해서는 환경과 자신의 상호작용 상태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메타인지’ 능력이 필요하다. 메타인지는 ‘인지에 대한 인지’로 자신의 느낌과 사고 그리고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조절하는 인지 능력이다. 우리는 이 메타인지를 통해 상황을 인지하고 예측하며 자의적으로 반응을 제어하고 조절할 수 있다. 인간은 메타인지라는 객관적 조망 능력 덕분에 자의지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 정신적 존재로 진화할 수 있었다. 인간 특유의 고차의식도 그 본질은 메타인지다. 메타인지를 통해 우리는 자신이 작동되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이에 개입해 자의적 알고리즘으로 전환할 수 있다. 우리는 알고리즘에 의한 존재이면서 그 알고리즘 속에서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우주적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하는 수동적인 존재인 동시에 자의적 알고리즘에 따라 스스로 통제하고 인생을 만들어가는 능동적 개체로 작동하는 존재다. 이처럼 인생은 수동적 능동태라는 점,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희망의 역설이자 반전이다. 우리는 과거의 결정론적 영향에서 벗어나 현재 마주하는 세상과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함으로써 인생의 열린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다.

 좋은 인생을 위한 두 개의 열쇠

세상의 모든 것은 관계와 상호작용으로 생성되고 존재한다. 현재 우리의 육신과 정신은 과거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자신=자신X환경). 인생 역시 그렇게 형성된 자신과 세상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진다(인생=자신×세상). 인간은 세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느끼고 반응하며, 성장하고, 일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인생은 자신과 세상이 함께 엮어가는 이야기다. 어떤 인생이 바람직할까? 답은 간단하다. 풍성한 상호작용이 좋은 인생을 만든다. 상호작용이 빈약하면 인생도 부실해진다.

그러면 풍성한 상호작용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에 대한 답도 ‘인생=자신×세상’이라는 간명한 인생방정식에 담겨 있다. 여기서 곱하기(×)는 상호작용이면서 ‘가치교환’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나와 세상은 서로가 욕망하는 가치를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한다.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가족, 연인, 친구, 동료, 고객 등 모든 사회적 관계는 본질적으로 ‘가치교환’ 관계다. 인생은 하루에도 수없이 반복되는 가치교환의 상호작용으로 점철된다. 풍성한 가치중심적 상호작용을 통해 성과가 축적된 것이 곧 성공이다. 우리가 원하는 성공은 자기 능력으로 세상의 욕망에 부합하는 성과를 만들고 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풍성한 상호작용의 핵심은 ‘긍정’과 ‘최선’이다. 긍정과 최선은 모든 상호작용에서 선순환적 촉매 역할을 하며 바람직한 성공을 유도해낸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알기 어렵다. 어느 날은 순풍이 불어와 돛을 펼치고 안정적인 항해를 할 수 있지만, 또 어느 날은 거센 역풍에 맞서 힘겹게 노를 저어야 할 때도 있다. 우리는 언제 순풍이 불어올지 역풍이 불어올지 알 수 없다. 바람의 방향을 스스로 바꿀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 바람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다. 긍정과 최선의 태도는 인생이라는 항해를 성공으로 이끌어주는 두 개의 열쇠다.

바다를 항해하며 순풍이 불어오기만 바랄 순 없다. 인생의 여정에서도 고통과 시련이 없길 기대할 순 없다. 어떤 인생이든 그 여정은 구불구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여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길을 가는 우리의 태도다. 사실 세상에는 기회도 위기도 정해져 있지 않다. 오직 상황만 있을 뿐이다. 인생 여정에서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그 상황을 유리한 기회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긍정이라면, 그 기회의 문을 힘차게 여는 것이 바로 최선의 노력이다. 세상이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 주어진 상황을 기회로 만들고, 그 기회를 통해 어떤 성과를 만들어낼지는 자신의 노력에 달려있다. 세상은 노력하는 사람에게 더 큰 기회를 주며 한 단계씩 올라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분명한 것은 한 발 한 발 스스로 발걸음을 내딛는 최선을 통해서만 최상의 삶을 향해 갈 수 있다는 점이다.

일본 파나소닉의 창업주인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자신의 성공 비결로 하늘이 내려준 세 가지 ‘운’을 말했다고 한다. 그것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이나 재능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그가 말한 세 가지 천운은 가난, 허약한 몸, 그리고 배우지 못한 것이었다. 집이 가난했기 때문에 구두닦이나 신문팔이처럼 힘든 일을 하면서 이른 나이에 다양한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고, 몸이 허약했기 때문에 열심히 운동해 노년에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해 만나는 모든 사람을 스승으로 삼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불운조차 천운으로 여겼던 ‘긍정적 자세’와 불리한 조건을 이겨내고자 했던 ‘최선의 노력’이야말로 그를 성공으로 이끈 요인이었다.

인생은 원래 힘들고 고단하다. 살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시련과 역경을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이 힘들고 고단하다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장할 수 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삶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극심한 가난과 건강 문제, 사업 실패 등 수많은 역경을 겪었지만, 이를 통해 더 강해졌고 결국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했다. 그의 철학은 ‘고난은 인생의 축복’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미국 해병대에서 신병을 모집할 때 쓰는 유명한 슬로건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고통은 나약함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만큼 나약함은 사라지고 강해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고통과 시련은 우리를 담금질해서 하수에서 선수로, 선수에서 고수로 성장하게 한다. 힘듦 없이는 성취도 없다. “잔잔한 파도는 노련한 사공을 만들지 못하고, 강한 바람을 이기지 못하는 나무는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현재만이 진실의 순간이다

인생은 '인(因)'과 '연(緣)'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진다. '인'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의미하며, '연'은 그 둘 사이의 상호작용을 뜻한다.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시점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지금 ‘현재’다. 그리고 이 현재 시점의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태도다. 그런 점에서 긍정과 최선의 태도로 산다는 것은 ‘현재’를 충실히 살아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과거에 사로잡혀 미련과 후회로 산다. 또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며 미리 가불하여 살기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이다. 그 이유는 현재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인생을 만들어가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자신X세상’이라는 인생방정식에서 보듯이, 인생은 현재 시점에서 이뤄지는 세상과의 상호작용 결과가 쌓여 만들어진다. 인생은 현재의 축적이다. 과거가 쌓여 현재가 되듯이, 현재가 쌓여 미래가 된다.

현재는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이며, 스스로 인생에 개입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의 시간이기도 하다. 인생이 결정론적 게임이 아니라 불확정적 게임인 이유는 과거는 닫혀 있지만 현재는 열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현재 어떤 태도로 상호작용하는가에 따라 미래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당신의 내일은 오늘의 당신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우주의 알고리즘대로 작동하는 존재이기에 자기 삶을 온전히 선택하기 어렵다. 태어난 환경, 유전적 특성, 사회적 상황 등 많은 부분을 선택할 수 없다. 희망의 반전이 만들어지는 지점은 ‘현재’이다. 우리는 객관과 합리를 바탕으로 바람직한 '현재'를 선택할 수 있다. 객관성은 자신이 독립적 개체가 아닌 전체 중 일부로서 다른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또 합리성은 우리가 모두 세상의 이치로 형성된 무위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현재 중심의 바람직한 상호작용을 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은 일기일회(一期一會), 즉 ‘일생에 단 한 번뿐인 만남’이다. 매 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기회이다. 현재를 사는 사람은 인생의 모든 순간을 기회로 만들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객관과 합리를 기반으로 지금 현재 마주한 세상과 긍정과 최선의 태도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이 부실하면 오늘이 쌓여 만들어지는 인생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를 잃어버리면 미래도 없다.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고,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현재의 행복을 소중하게 누리며 세상과 나누는 것이 최상의 삶을 위한 단순하지만 명징한 진리이다.

 최대한 많이 사는 삶

우리는 종종 인생의 목표를 '최고'에 두곤 한다. 최고의 학교에 진학하고, 최고의 직장에 취업하며, 최고의 삶을 사는 것, 그런 것들을 성공한 인생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최고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상대적 개념이다. 누군가를 이겨야 최고가 될 수 있다. 이는 한 명만 승자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패자가 되는 무한 경쟁의 제로섬 게임이다.

하지만 인생의 본질은 이기고 지는 전투가 아니다. 오히려 인생은 서로가 원하는 가치를 나누고 교환하는 상호작용의 포지티브섬 게임이다. 인생방정식 ‘인생=자신X세상’에 담긴 지혜는 최선을 다해 풍성한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곧 최상의 삶이라는 것이다. 최상의 삶을 살기 위해선 '최대한' 살아야 한다. 최대한 산다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매 순간 긍정의 태도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자기 능력과 가능성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최대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우리의 존재 자체가 놀라운 기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네 가지 중대한 기적의 결과물이다. 138억 년 전 빅뱅(Bigbang)으로 인한 우주와 물질의 생성, 약 38억 년 전 지구 생명체의 공통 조상인 루카(LUCA)의 탄생, 생물이 자연선택과 적응을 통해 환경에 맞춰 진화해온 선택적 과정, 그리고 신경계와 의식의 출현이 그것이다. 우리는 억겁의 시간 동안 수많은 우연과 필연의 변곡점을 지나며 우여곡절을 겪어오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파란만장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우주에서 유일하게(적어도 태양계에서는)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인간으로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

우리 존재는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장대한 역사가 빚어낸 경이로운 결실이다. 인간은 무의미한 물질 덩어리가 아니며, 단순히 배를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도 아니다. 우리는 생물로서, 사회적 동물로서, 그리고 의식을 지닌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과 세상을 인식하고 이해하며 경험한다. 또한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가치를 타인과 나누며 사랑의 향기를 세상에 퍼트리는 존재다. 이렇듯 기특하고 아름다운 생명체가 또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그냥’ 태어났지만, ‘그냥’ 살 수는 없다. 대충 살 수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되는 존재다.

둘째, 우리는 유전적 연속성의 한 부분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지난 38억 년 동안 질기디질긴 유전적 고리를 이어와 현재 존재한다. 지난 시간 수많은 매듭과 위기가 있었지만 한 번도 그 유전적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우리의 소명은 간단하다. 면면이 이어져온 맥을 다음 세대에 잇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다. 우리 존재는 유전자와 환경의 복잡한 상호작용 결과이며, 동시에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이 된다. 이는 우리에게 권리와 더불어 큰 책임을 부여한다.

우리는 사회라는 거대한 유전자풀에 속한 개체다. 개개인이 이룬 성과가 최종적으로 사회 전체의 발전과 번영에 쓰이는 것은 당연하다. 나의 능력은 내 것이 아니다. 능력은 사회의 소유다. 우리가 태어날 때 가져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기회도 세상으로부터 주어진다. 내 능력의 주인도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이고 사회이다. 따라서 능력은 권리가 아니라 책임이다. 우리의 능력은 곧 책임의 크기를 의미하며,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이 최대한 사는 삶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나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것을 갖지 못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성취가 나의 재능과 노력의 결과이고 내 소유라는 생각은 오만이거나 착각에 불과하다. 얻고 받은 것이 있으면 마땅히 갚아야 한다. 대부분 경영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크고 탁월한 능력을 가졌는데, 이는 자신의 것이 아니다. 사회의 소유이고 공공의 자산이다. 많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사회 발전과 번영에 기여하는 것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책무다.

셋째, 우리는 죽어서도 존재한다. 역설적으로 삶의 가치는 죽음으로 승화된다. 우리 존재는 육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육신의 소멸 후에도 정신은 세상에 남아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는 동기와 나침반이 된다. 육신의 삶은 유한하지만, 정신의 삶은 무한하다. 정신을 남길 수 있다면 죽어서도 죽지 않는다. 죽어서 사는 삶, 그것이 바로 영원한 가치의 삶이 아니겠는가?

결국 우리가 '최대한' 살아야 하는 이유는 세 가지 당위적 ‘책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우연히 만난 자신에 대한 당위적 책임이다. 우리는 기적과 축복의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로서, 그 삶을 가장 멋지고 가치 있게 살아내야 할 당연하고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둘째,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당위적 책임이다. 우리는 사회로부터 만들어지고 연결되어 그 일부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 발전과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이바지해야 할 당연하고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셋째, 죽음 이후의 세상과 후대에 대한 당위적 책임이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도 남아 이어질 세상이 좀 더 밝고 맑고 따뜻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당연하고도 충분한 이유가 있다.

랠프 월도 에머슨은 “진정한 성공이란 자신이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한 사람의 인생은 그의 생이 다하는 순간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발자취를 통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마하트마 간디, 마더 테레사, 넬슨 만델라와 같은 선현들의 삶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마하트마 간디는 비폭력과 평화의 메시지로 인도의 독립을 이끌었고, 마더 테레사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쳤으며, 넬슨 만델라는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며 남아공의 새로운 미래를 열었다. 그들 모두는 자신의 생애를 통해 인류애를 실천하고 이 세상에 커다란 유산을 남겼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적 유산은 육신의 삶이 다한 이후에도 여전히 수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남아 살아 숨 쉬고 있다.

최대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최대한’ 산다는 것은 ‘많이’ 산다는 것이다. 많이 산다는 것은 나 한 사람이 아닌 세상 전부를 사는 것이다. 개인의 경계를 넘어 세상과 하나 되는 삶, 그것이 최대한 많이 사는 삶이다. 최대한 많이 사는 삶은 ‘나’가 아닌 ‘우리’로, ‘일부’가 아닌 ‘전부’로 사는 삶이다. 세상과 하나 되는 삶은 내가 없어지는 희생의 삶이 아니다. 오히려 나를 내어주고 전부를 얻는 수지맞는 삶이다. 내가 세상을 위해 살면 세상도 나를 위해 살아준다. 세상과 하나 되는 삶이야말로 풍성하게 존재하는 삶이고 최대한 많이 사는 삶이다.

 잘 죽는 것이 잘 사는 길이다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어떻게 죽을지 물으며 어떻게 살지 답을 얻는다. 죽음을 떠올리는 일은 왜 지금 살아 있는지 묻는 일과 같다.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 선고를 받은 후에 “눈앞에 다가온 나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준 가장 중요한 도구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누구도 죽음을 피해 갈 수 없다. 죽음은 모두의 숙명이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인생은 죽음으로 완성된다. 유전자풀의 일원으로서 소명을 다하는 순간이 죽음이다. 한 사람의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그 사람의 삶은 죽음과 함께 종료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삶은 그대로 남은 사람들의 삶이 되어 이어진다. 그렇게 나의 죽음은 타인의 삶과 연결된다.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 잘 사는 것은 최대한 사는 것이다. 자신을 모두 불태우고 최대한 살 수 있다면 죽음은 더 이상 삶의 종료나 소멸이 아닌 완성의 순간이 될 것이다. 완성은 절대적 상태가 아니라 동적인 과정이다. 즉 완성은 ‘다다름’이 아니라 ‘다가감’이다. 완성의 다른 말은 ‘최고’가 아닌 ‘최선’이다. 죽음을 나침반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삶은 아름답게 완성되며 최상의 경지에 다가가게 된다.

우리는 ‘세 번 태어나는’ 존재다. 먼저 몸으로 태어난다. 기적의 생명으로 얻은 육신의 삶은 느끼고 생각하는 의식적 존재에게 주어지는 존엄한 ‘권리’의 삶이다. 두 번째로 삶의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다시 한번 태어난다. 깨달음의 삶은 우리가 연결된 존재임을 이해하고 받은 것을 세상에 돌려주는 ‘소명’의 삶이다. 마지막으로 죽음을 통해 또 한 번 새롭게 태어난다. 이는 죽음으로써 다시 태어나 영원히 사는 ‘초월’의 삶이다. 자신이 세상에 남기고 가는 무형의 가치가 세상 사람들에게 삶의 길을 비춰줄 때 우리는 자기를 초월해 영속적 존재가 된다.

조지 버나드 쇼는 <인간과 초인>이라는 희곡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의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특권은 살아 있는 동안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더 많은 일을 한다는 것은 곧 많이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죽을 때 완전히 소모되어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내게 잠시 타고 마는 촛불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잠시 쥐고 있는 찬란한 횃불입니다. 이 횃불을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기 전에 나는 최대한 밝게 타오를 것입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왜 인생이 촛불이 아니라 횃불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인생이 자기 자신만을 밝히는 작은 촛불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불타오르는 횃불이 돼야 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횃불의 삶은 자신을 태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풍성하게 살도록 길을 안내하는 등대의 삶이다.

우리는 초대장도 없이 우연히 지구라는 행성에 태어나 필멸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지만, 한편으론 뒷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불멸의 가치를 남길 수 있는 존재기도 하다.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정표가 되는 의미 있는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삶의 책임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경영자가 세상에 남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유산은 ‘사람’이다. 경영자에게 주어진 막중한 책임은 사람을 키우고 남기는 것이다.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최상의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기업은 물론 사회의 미래도 더욱 밝아질 것이다. 기업과 경영자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후에도 소멸하지 않을 소중한 가치인 사람을 남기는 일이야말로 경영자의 가장 중요한 소명이다.

삶이란 나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세상으로 나를 넓혀가는 과정이다. 경영자의 삶 역시 개인의 성장과 사회적 책임이 조화를 이룰 때 숭고한 여정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여정에서 우리는 결을 배우고 익히며 닦아간다. 삶은 그 결의 길을 완성하는 복원의 여정이다. 경영자의 삶은 사람의 결을 통해 경영의 길을 감으로써 완성된다.

 삶이란

삶이란
세상을 통해 나를 배우고
나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며
나와 세상이 하나가 되어가는
복원의 여정(旅程)이다.
 
삶이란
나를 넓혀가는 과정(過程)이다.
나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세상으로 나를 넓혀간다.
 
삶이란
이기에서 이타로 가는 덕정(德程)이다.
나의 이기에서 우리를 위한 가치로
세상을 향한 이타로 사랑을 키워간다.
 
삶이란
마음을 밝혀가는 도정(道程)이다.
주관에서 객관으로
객관에서 이치로 밝혀간다.

이 글은 한국경제신문 6월 28일자에 게재된 한경에세이 ‘경영자의 삶은 책임이다’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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