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넙죽이
"대전엔 성심당 말고 OOO도 있다." 이 퀴즈 같은 문장은 어느 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 중에는 파란 조약돌을 닮은 넙죽이가 답안 중 하나로 소개돼 있다. 넙죽이는 우리 학교 대표 캐릭터다. 누가 언제 이름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평범하면서도 비범하다. 가로로 넙적한 파란 얼굴에 두 눈만 덩그러니 뜬 맹한 표정의 넙죽이. 불멍, 물멍이 필요한 시대라 무표정한 얼굴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기사에 소개된 넙죽이의 볼록 튀어나온 배에는 KAIST라고 적혀있지만, 두 손으로 커다란 소보로 빵을 잡고 있다. 과학은 어렵고 재미없다는 선입견이 순간 깨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요, 과학 공부 전에 배부터 채우자며 식욕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다. 지역 특색을 활용해 과학 도시로서 정체성을 홍보하는 선두에 선 느낌이 든다.
넙죽이 캐릭터는 '카이'라는 우주인으로 시작했다. 2014년 즈음 KAIST 브랜드 리뉴얼을 담당했던 디자이너의 초안은 청동기 시대 반달돌칼과 비슷한 형태로, 가로로 넙적하긴 했으나 끝이 뾰족했다. 나의 턱선은 더 날카롭기를 열망하지만, 캐릭터의 날선 모습에는 거부감이 있었던 것일까? 그 일 이후로 학생들은 여러 가지 응용 버전의 브랜드를 탄생시켰지만, 특별히 주목받는 작품도 없이 낙서 같은 습작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했다.
필자는 KAIST미술관 운영을 맡고 있으며 브랜드 사업의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다. 브랜드 업무를 시작하던 2년 전, 마땅히 내세울 만한 대표 캐릭터가 없어 난감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간 학생들이 탄생시킨 응용 버전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이게 웬일인가. 유독 잘 정돈된 디자인이 번쩍 눈에 띄었다. 뾰족했던 얼굴은 타원으로 정리됐고 팔과 다리도 최소한의 실루엣만 남았다. 얼굴에는 동그란 두 눈만 있지만 충분히 귀엽다. 군더더기 없이 완벽한 디자인이란 결론을 내렸다.
누가 디자인 했을까. 어디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2017년 정도에 등장한 것으로 보아 창작자는 졸업생일 것 같았다. 특허나 저작물 그 어느 지식재산권에 대한 기록도 없었으나, 타인의 창작물을 허락도 없이 사용하는 것은 위법이다. 저작권이라는 것은 창작을 하는 순간 발생하는 지식재산권이기 때문이다.
즐거운 고민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이다. 박사과정 막바지를 달리고 있던 제자 K와 학위 논문에 대한 면담을 마치려던 순간이었다. "교수님, 그 넙죽이는 제가 학부 4학년 때 디자인해 본 건데요." 이런 기가 막힌 인연이 있을까. 그 순간부터 넙죽이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다양한 제품과 콘텐츠로 개발됐다. 원본 디자인이 워낙 뛰어나서 캐릭터 제품을 디자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의류, 문구류, 생활용품, 이모티콘, 악세서리 등 넙죽이를 활용한 굿즈는 200 종이 넘게 확장됐고, 매출 금액도 고공행진을 이어오고 있다. 대전 꿈돌이와 어부바 놀이도 하고 산타복장을 입을 때도 있다. 우주인 복장 넙죽이는 우주과학에 관심 있는 방문객에게는 최고의 아이템이다. 과학 영재도 멍때리고 싶고 빈둥거리거나 장난치고 싶은데, 넙죽이는 그런 긴장 풀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것이다.
KAIST브랜드 사업은 학교의 자회사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브랜드 사업 매출액의 절반 이상이 넙죽이 캐릭터 굿즈로, 판매 금액은 KAIST에 적지 않은 수익금과 기부금으로 환원되고 있다. 여기에는 제자 K가 자신의 넙죽이 2차 저작권을 흔쾌히 학교를 위해 활용하도록 허용해 준 기여가 크다. 브랜드 사업에 동참하고 있는 다른 구성원들도 저작권에 대한 라이센스 수입을 KAIST발전기금으로 기부해오고 있다. 그 기특한 제자 K는 그 다음 학기에 박사가 됐고, 지금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넙죽이 같이 귀여운 학생들 앞에서 조금 더 큰 넙죽이가 수업하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석현정 카이스트 교수 겸 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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