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없는 게 ‘죄’는 아니잖아

뉴욕·양호경 통신원 2024. 6. 27. 0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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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를 범죄화하는 조례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 판결이 빠르면 6월 중 나올 예정이다. 해당 판결에서 노숙이 불법으로 규정될 경우 노숙자 25만명이 범죄자가 된다.
3월23일 미국 오리건주 그랜츠패스시의 한 노숙자가 공원의 텐트 근처를 걷고 있다.ⓒAP Photo

데브라 블레이크 씨는 2019년 9월11일 오전 7시30분쯤에 오리건주 그랜츠패스시(City of Grants Pass) 공원에서 침낭을 깔고 누워 있었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약 10년 전 직장과 주택을 잃고 노숙 생활을 이어가던 블레이크 씨는 여러 건의 노숙 관련 유죄판결로 5000달러(약 689만원) 이상 벌금을 체납하게 됐다. 존 로건과 글로리아 존슨 씨는 집이 없어 공공 토지와 도로에 자동차를 주차하고 잠을 자는 노숙을 계속하다 경찰에 단속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노숙으로 처벌받은 이들은 비영리 법률단체의 도움으로 그랜츠패스시 노숙자 처벌 조례에 위헌 소송을 냈다. 지방법원과 항소법원에서는 노숙자 측이 승소해 조례 시행이 금지되었지만, 그랜츠패스시는 이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연방대법원에 최종 판단을 넘겼다. 지난 4월22일 연방대법원에서 공개변론이 있었다.

노숙자 측 변호인은 “비자발적 노숙자를 처벌하는 조항은 수정헌법 제8조를 위반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수정헌법 제8조는 ‘과도한 벌금이나 잔인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금지‘하는 것으로 비례성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진보 성향으로 평가되는 엘레나 케이건 대법관은 수면은 숨을 쉬는 것처럼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전제하며, 형벌을 부과할 만한 노숙자의 행동은 단지 “담요를 덮고” 잔 것뿐이기에 비례성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 역시 “별을 보다가 담요를 덮고 잠드는 것을 처벌하지 않는다”라며 그랜츠패스시의 처벌 조항은 결국 집이 없는 ‘상태’에 대해 죄를 묻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보수파 대법관들은 노숙자 문제가 복잡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결국 지역 의회와 사회에서 가장 잘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브렛 캐버노 대법관은 “누가 (노숙자 문제를) 현장에서 처리할까? 연방대법원 판사일까? 아니면 지역의 비영리단체나 종교단체일까?”라며 그랜츠패스시의 조례가 위헌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수정헌법 제8조를 중심으로 한 논쟁의 이면에는 노숙자 문제 해결에 대한 인식 차이가 담겨 있다. 그랜츠패스시를 대리하는 변호사는 “공공장소, 거리, 공원에서 사는 것은 노숙자에게 해롭고, 도시 범죄를 유발하는 등 악영향을 끼친다”라고 했다. 하지만 원고 중 한 명인 존슨 씨는 노숙의 범죄화는 근본 해결책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존슨 씨는 NBC NEWS와의 인터뷰에서 “(노숙을 범죄로 규정하면) 도시는 모든 노숙자를 지역사회에서 쫓아내려 할 것이고, 그들은 다른 곳으로 가서 여전히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며 문제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결국 노숙자가 거리로 내몰리지 않을 만큼 충분한 지원이 있는가 하는 문제다. 위헌 소송 1심 판결문에 따르면 그랜츠패스시는 고층빌딩 하나 없는 인구 3만9000명의 소도시다. 2019년 기준 노숙자가 602명이고, 다른 사람의 집에서 잠을 청하는 사람까지 포함하면 인구의 4.2%에 달하는 1647명이 주거가 없다. 최근에는 인구가 늘어 월세 1000달러(약 138만원) 이하 저렴한 주택이 거의 없는 상황이다. 시 당국의 임대주택 지원은 전무하다. 그런데 최대 30일까지만 지낼 수 있는 쉼터에는 침대 138개만 존재할 뿐이라고 판결문은 지적하고 있다.

미국 노숙자 인권 단체 소속 활동가들이 4월22일 워싱턴 DC에 위치한 연방대법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주택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AFP PHOTO

시민단체들은 집회를 열어 대법원의 위헌 결정을 촉구했다. “주택이 인권이다”라며 노숙자를 위한 쉼터와 임대주택을 확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비싼 임대료와 부족한 주택 문제 해결이라는 근본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노숙자 문제 해결을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2023년에 87억3200만 달러(약 12조240억원)를 투입했지만, 그해 노숙자 수가 65만명으로 전년 대비 12%나 증가하는 등 큰 흐름을 막지는 못했다.

노숙자는 위험하다?

미국 역사상 노숙자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공개변론은 단 하루로 종결됐고, 이르면 6월30일 이전에 결론이 날 것으로 보인다. 노숙자를 범죄화하는 조례가 합헌으로 결정되면 노숙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 다른 주들도 적극 움직이리라 예상된다. 오리건주를 포함해 이미 10개 주에서 노숙을 불법으로 보고 벌금이나 징역을 부과할 수 있는 법이 통과되었다. 연방대법원 판결에 따라 노숙이 불법으로 규정되면,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매일 ‘밖에서’ 잠들어야 하는 노숙자 25만명은 범죄자가 될 처지에 놓인다.

소송에서 노숙자 측이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근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노숙자 65만명을 지원할 정부 예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진보적이라고 평가받는 민주당 소속 시장들이 노숙자 증가로 도시 슬럼화가 계속되면서 강경 대응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고 있다. 노숙자 문제가 심각한 캘리포니아 주지사 등 민주당 소속 단체장들은 기본적으로 노숙자 범죄화에는 반대하면서도 노숙자 야영지는 철거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샌프란시스코시는 포용적 정책이 계속되면 주변 도시의 노숙자가 더 모여들 것을 우려하며 보수 진영에서 주장하던 약물검사와 치료 정책을 도입하기로 했다.

미국에서 노숙자 야영지는 마약·범죄 등과 연관성이 높아 “노숙자는 위험하다”라는 인식이 강하다. 이를 입증하거나 반증하기 위한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 중이지만 합의된 결론은 아직 없다. 다만, 이번 연방대법원 판결은 노숙자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용하고 지원해야 할 시민인지, 범죄를 저질러서 격리해야 할 사람인지에 대한 인식의 변곡점이 될 것이다.

뉴욕·양호경 통신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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