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를 ‘우주대스타’로 찬양?…고려를 원숭이로 욕한 혐한파였다[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기자 2024. 6. 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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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기개와 절조는 우주를 능가하고(先生氣節凌宇宙) 선생의 문장은 별처럼 빛나기만 하여라.(先生文章煥星斗)”

조선 전기 문인·학자인 서거정(1420~1488)이 ‘선생’을 찬양하고 있다.(<사가시집> 51권 ‘시류·소선적벽도’) 서거정이 말 그대로 ‘우주대스타’로 떠받는 ‘선생’은 과연 누구인가. 북송이 낳은 대문호 소식(소동파·1037~1101)이다.

고려의 대문호인 이규보(1168~1241)는 어떤가. “소동파의 문장은 금은보화가 창고에 가득찬 부잣집 같아 도둑이 훔쳐가도 줄지 않으니 표절한들 어찌 해롭겠느냐”(<동국이상국집> 권26 ‘답전이지논문서)고 극찬했다.

조선 후기 화승 중봉당 혜호가 그린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소동파 그림’(소동파 입극도). 소동파는 고려-조선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우주대스타’로 숭배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독서광으로 소문난 조선조 세종(1418~1450)은 “소동파와 구양수(1007~1072)의 편지모음집인 <구소수간>을 30번이나 읽었다.(<세종실록> 1423년 12월23일)”고 했다. 그 정도로 소동파의 열혈팬이었다.

그런데 반전이다. 고려~조선 지식인들이 ‘우주대스타’로 떠받든 소동파는 딴소리를 해대고 있다.

“고려는 해외의 오랑캐요, 거란의 심복입니다.”(<동파집> ‘고려의 진상에 관해 논하는 상소문’)

“사람 옷 입은 원숭이(胡孫·고려)가 사람(중국)을 농락한다는 옛말이 맞다.”(<소식문집> 권72 ‘황식이 고려가 북쪽 오랑캐와 통한다고 말하다’) 이게 무슨 막말인가. 고려를 오랑캐는 물론이고, 심지어 ‘원숭이’로 깎아내리고 있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단원 김홍도의 ‘서원아집도’(1788)는 북송 시대 대문호인 소동파 등 16명이 모여 즐긴 문예활동을 그린 그림이다. 그림에는 시문을 창작하는주인공 소동파와, 암벽에 글을 쓰는 미불, ‘귀거래도’를 그리는 이공린, 비파를 연주하는 도사 진경원, 설법을 전하는 승려 원통 등이 그려져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필(神筆)의 작품

얼마전 국가유산청(문화재청)이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서원아집도 6폭 병풍’을 보물로 지정했다.

다들 단원 김홍도 작품의 가치에 초점을 맞췄지만 필자는 ‘소식’, 즉 소동파를 떠올렸다. 왜일까.

‘서원아집도’가 어떤 작품인지부터 알아보자.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은 북송시대 인물인 왕선(1036~1089)이 1087년쯤 수도 개봉에 있던 자신의 집(서원·西園)에서 소동파·이공린·미불 등 당대 문인들과 즐긴 문예활동을 고사인물도이다.

김홍도의 ‘서원아집도’에는 귀거래도를 그리는 이공린 뒤에 배치된 삽병(나무틀에 끼워놓은 병풍)에 ‘동파사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그림의 주인송이 소동파라는 것을 암시한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홍도의 <서원아집도>는 1788년(정조12) 명나라 구영(1498~1552)의 작품을 토대로 그린 것이다.(1887) 그러나 구영을 답습하지 않았다. 배경의 버드나무를 비롯한 암벽, 소나무 등을 과감한 필치로 그려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여기에 삽병(나무틀에 꽂은 병풍)을 넣고, 사슴과 학을 추가하여 ‘조선풍 서원아집도’를 완성했다.

작품을 보자. 병풍 같은 암벽 앞에서 16명이 5개의 군으로 배치되어 있다.

시문을 창작하는 소식, 즉 소동파와, 암벽에 글을 쓰는 미불(1051~1107), ‘귀거래도’를 그리는 이공린(1049~1106), 비파를 연주하는 도사 진경원(1025~1094), 설법을 전하는 승려 원통(1015~1082) 등이 보인다. 5~6폭 위에는 “김홍도의 작품을 ‘신필(神筆)’이라 극찬한 표암 강세황(1713~1791)의 발문이 적혀있다.

조선 전기 문인·학자인 서거정(1420~1488)은 “선생(소동파)의 기개와 절조는 우주를 능가하고, 선생의 문장은 별처럼 빛나기만 하다”고 숭배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소동파 숭배모임

‘귀거래도’를 그리는 이공린의 뒤에 배치된 삽병(나무틀에 끼워넣은 병풍)을 자세히 보라.

왼쪽에 희미하게 쓰여진 글씨가 있다.‘동파거사(東坡居士)’이다. 김홍도는 왜 16명이 등장하는 ‘서원아집도’에 ‘동파거사’만 써놓았을까.

‘서원아집도’의 주연이 소동파라는 뜻이다. 맞다. ‘서원아집도’의 등장인물 16명은 북송 연간에 소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이라 할 수 있다. 11세기 말 왕안석(1021~1086)의 신법 정책에 반대한 구법당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는 “입시(과거)’에 매달리던 사람들이 과거 합격 후 소동파의 시를 즐겨 읽는다. 그러므로 과거합격자 방이 나붙으면 사람들이 ‘올해도 소동파가 33명 나왔다’고 이구동성 한다.”고 전했다.|국립중앙도서관·국사편찬위원회 자료

소동파는 구법당의 대표인물이었다. 따라서 ‘서원아집’은 소동파를 중심으로 결성된 ‘소동파 모임’이라 할 수 있다.

이 ‘소동파’ 주인공의 서원아집도는 단원 김홍도 뿐 아니라 여러 전문 및 문인화가들이 다투어 그렸다. 그 뿐이 아니다. 조선조 당시 소동파와 그 문인들이 즐긴 풍류를 ‘따라 하는 풍조’가 성행했다.

“신정하(1680~1715)는 소동파를 사모하여 문장을 짓고 글자를 씀에 한결같이 본받고, 거처하는 곳에 소동파 그림을 걸어놓고 동파관을 썼으며 <동파집>을 쥐고 그림을 대했다”(<동계집>)고 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과 김부철 형제의 이름이 소식과 소철 형제을 따서 지은 것으로 전해졌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신위(1767~1845)는 해마다 12월19일(소동파의 생일) 소동파 초상화 4본과, 자화상(신위 본인)를 걸고, 소동파의 시첩 병풍을 뒤에 두어 제사를 지내며 시를 지어 기념했다.(<경수당전고> 권8 ‘벽로방고4’)

심지어 소동파를 숭배하는 모임인 ‘배파회(拜坡會)’도 이곳저곳에서 열렸다. 조선말기 여항 서화가인 조희룡(1789~1866)은 “소동파의 생일인 1852년 12월19일 <동파입극도>를 걸어 두고, 향을 피우고 차를 올려 홍생⋅주생과 함께 동파공의 생일을 쇠었다”(<조희룡전집> 4)고 전했다.

배파회 중에는 강위(1820~1884) 등 당대의 문인들이 소동파 생일(12월19일)에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주고받은 모임이 가장 유명했다. 해마다 20여명이 모인 ‘배파회’는 해방되던 1945년까지 거행되었다.

<서원아집도>에는 도사(진경원)가 비파를 연주하고 승려(원통)가 설법을 전하는 내용이 그려져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동파 33명 탄생

그렇다면 고려~조선의 지식인들은 왜 소동파에게 열광했으며, 거꾸로 소동파는 왜 동시대 고려를 ‘오랑캐-원숭이’로 깎아 내렸을까. 북송의 대문호 소동파의 인기는 대단해서 당대 고려에까지 전해졌다.

“입시(과거)’에 매달리던 사람들이 과거 합격 후 소동파의 시를 즐겨 읽는다. 그러므로 과거합격자 방이 나붙으면 사람들이 ‘올해도 소동파가 33명 나왔다’고 이구동성 한다.”(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당대 고려의 MZ세대에게 불어닥친 ‘소동파 열풍’의 단면이다. 한림학사 권적(1094~1147)은 “소동파 문장은…불에 태워 재로 만들 수 있지만 천고의 꽃다운 명망은 불태울 수 없다”(<파한집> 권하)고 찬양했다.

다산 정약용은 “소동파의 글을 평생 읽어도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는 없다. 유교를 좀먹는 좀벌레”라 비판했다.

이색(1328~1396)은 “저 우뚝한 동파 늙은이의 문장은 불꽃이 만 길이나 세차게 올랐다”(<목은시고> 16권)고 숭배했다.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의 아버지 김근(생몰년 미상)은 소동파의 열혈팬이었다.

아예 셋째(김부식) 넷째 아들(김부철)에게 소동파 형제(소식·소철)의 이름을 붙여 개명했으니 말이다.

퇴계 이황은 “소동파가 비록 흠결이 있었지만 마음의 욕심은 적었다. ‘진실로 내가 가진 바가 아니면 털끝만한 것도 취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소동파는 귀양 갈 때 관을 싣고 갔다. 속세에 구속받지 않는 모습이다”라 평가했다.|그림은 강세황의 ’도선서원도‘

그 일화가 중국에도 꽤 알려졌던 모양이다.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의 고려사행기인 <고려도경>과, <환유기문>을 인용한 청나라 시인 왕사정(1634~1711)의 <향조일기>에 자초지종이 나와있다. 즉 “서긍이 김부식(金富軾·1075~1151)·부철(富轍·1079~1136) 형제의 이름에 대해 묻자 김부식이 ‘소식(소동파)소철 형제를 사모해서 지었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마 김부식·부철 형제의 아버지(김근)가 1080년 7월 송나라를 방문했을 때 지은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은 “주자가 이단에 빠진 소식을 비판했지만 일찍이 소동파의 지절(지조를 지킴)을 찬양하고 그를 어진 사람으로 지칭했다”고 평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는 몽골군의 대대적인 침입(1236년 제3차)으로 전 국토가 전화에 휩싸인 와중에서 소동파의 문집(‘동파문집’)이 발간했다.

이규보가 쓴 문집의 발문을 보자. “오랑캐의 칩입에 사세가 위급했다. 그러나 완산태수 최군지는 ‘옛날엔 전쟁 때에도 노래를 부르고 문학을 강론했다. 저 시시한 오랑캐 때문에 (문집 발간을) 미룰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소동파 문집인가. 이규보는 “소동파의 문장이 해박하고 인용이 풍부해서 그 영양분이 사람들에게 두루 미쳤다”면서 “사대부에서 신진 후학까지 소동파의 향기를 되씹어 보았다”고 전했다.

조선 중기 문인·학자 정구(1543~1620)는 “소동파의 ‘적벽부’는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북송의 정이가 살아 있다면 무릎을 꿇고 이 작품을 읽어 주고 싶다. 정선생(정이)도 이 문장(적벽부)을 인정해줄 것”이라고 했다.

■유교를 좀먹는 좀벌레

그렇지만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조에 들어서 소동파는 선뜻 용납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일례로 ‘서원아집도’에 등장하는 두 인물, 즉 도사(진경원)와 승려(원통)를 보라. 유교는 물론 불교와 도교까지도 포용했다는 증거다.

게다가 소동파는 당대 저명한 유학자이자 정주학(성리학)의 창시자인 정이(1033~1107)를 마음껏 비웃었다.

상촌 신흠(1566~1628)은 “소동파의 시와 문장은 모두 신의 경지에 들어갔다”(<상촌고> 청창연단 중)고 극찬했다.

그러자 정이는 소동파를 크게 원망했다. 정이·정호(1032~1085) 형제를 사모하며 성리학을 완성한 주희(1130~1200)가 그런 소동파를 곱게 볼리 없었다. 주희는 “제멋대로 하기를 좋아하는 소동파는…상대를 비방하고…정이가 받는 공경 ‘경(敬)’자를 타파하고자 했다”(<주자어류> ‘권130)고 비판했다.

이러니 성리학의 입장에서 소동파를 이단으로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조선조 개국공신 정도전(1342~1398)은 “소식은 이단의 논리를 펴서 예법을 사라지게 했다”(<고려사> ‘열전 정도전’)이라 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소동파 등의 글은 평생 읽어도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는 없으니 유교를 좀먹는 좀벌레”(<여유당전서> 제1집 시문집 권11 오학론3)라고 비판했다.

조선말기 유학자인 김영한은 추가 김정희를 ‘소동파의 재림’으로 표현했다. 타고난 재주와 해박한 지식 및 견문, 비범한 서·화법은 물론이고 군주의 총애를 받다가 유배를 다녀온 것도 똑같다고 했다.

■이황·송시열도 ‘인정’

하지만 ‘성리학의 나라’인 조선에서도 ‘소동파=불세출의 문장가’라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컨대 퇴계 이황(1501~1570)은 1561년(명종16) 4월15일 도산서원 주변에서 뱃놀이를 즐기면서 소동파의 ‘전 적벽부’를 읊고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소동파가 비록 흠결이 있었지만 마음의 욕심은 적었다. ‘내가 가진 바가 아니면 털끝만한 것도 취하지 않는다’는 구절을 보면 알 수 있다. 소동파는 귀양 갈 때 관을 싣고 갔다. 속세에 구속받지 않는 모습이다.”(<퇴계집> ‘언행록 3·유편·산수를 즐김’)

고려-조선 지식인들이 우주대스타로 꼽았던 소동하는 알고보면 지독한 혐한파였다. 소동파는 7차례의 상소문을 올려 “송나라를 방문하는 고려 사신들을 접대하고 답례품을 하사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성을 쌓고 배를 만들고 관사를 짓느라 각 지방의 백성들이 동원되고 있다”고 비난했다.|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송시열(1607~1689)은 “이단에 빠진 소식이 농간을 부려 그 해가 무궁무진했다”고 비판하면서도 “그럼에도 주자는 일찍이 소동파의 지절(지조를 지킴)을 찬양하고 그를 어진 사람으로 지칭했다”(<송자대전>) 권131·연거잡록)고 평했다.

홍석주(1774~1842)는 “소동파는…경박하고 기이한 것을 좋아했으므로 논자들이 싫어했다. 그러나 그의 문장은 천하의 기재라 하지 않을 수 없다”(<홍씨독서록>)고 평가했다.

정리하자면 소동파는 성리학 측면에서는 ‘이단’이지만 천재적인 문장만큼은 욕할 수 없다고 긍정 평가한 것이다. 여기에 직언을 꺼리지 않는 성격과 애민·애국의 자세, 활달한 인생관, 슬픔을 즐거움으로 승화하는 ‘쿨’한 모습 등이 거론되고 있다.

소동파는 “고려는 오랑캐이자 거란의 앞잡이”라면서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송나라에 아무런 이익도 없으며 오로지 5가지 해악만 있을 뿐”이라면서 조목조목 따졌다.|국립중앙도서관 자료

■‘신계(神界)’에서 독야청청

성리학이라는 딱지를 버리면 소동파와 그의 작품은 ‘신의 경지’, 즉 ‘신계(神界)’에 홀로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중기 문인·학자 정구(1543~1620)의 언급이 흥미롭다.

“소동파의 ‘적벽부’ 문장은 인간의 작품이 아니다. 북송의 정이가 살아 있다면 내가 이 작품을 잘 써서 무릎을 꿇고 한번 읽어 주고 싶다. 정선생(정이)도 이 문장(적벽부)을 인정해줄 것이다.”(<한강집> ‘한강언행록 권3 유편 잡기)

상촌 신흠(1566~1628)은 “소동파의 시와 문장은 모두 신의 경지에 들어갔다”(<상촌고> 권51 청창연단 중)고 극찬했다.

그래서일까. 소동파와 동일시 하려는 풍조가 나타났다. 조선 말기 유학자인 김영한(1878~?)은 추사 김정희(1786~1856)를 ‘소동파의 재림’으로 표현했다. “추사의 뛰어난 재주와 나라를 빛낼 만한 솜씨가 소동파와 똑같고, 해박한 견문과 학식도 똑같으며 신묘한 경지에 들어간 서·화법도 똑같고…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유배를 당했지만 초연히 우뚝 선 것도 같다”(<완당전집> ‘권수’)

소동파는 “고려 사신 대접에 쓰이는 돈(10만관)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휼한다면 최소한 몇 만 명은 살릴 수 있을 것”(1089년 12월 3일의 상소문)이라 주장했다.

■소동파의 ‘급발진’

하지만 좀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소동파가 지독한 ‘혐한파’였다는 것이다. 소동파는 무려 7차례에 걸쳐 “고려 오랑캐와는 절대 상종하지 말라”는 요지의 상소문을 올린다.

집요하기 이를 데 없다. “송나라를 방문하는 고려 사신을 접대하고 답례품을 하사하는 비용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성을 쌓고 배를 만들고 관사를 짓느라 각 지방의 백성들이 동원되고 있습니다.”(1089년 11월 3일의 ‘고려의 진상에 대해 논하는 상소문’)

소동파는 1085년 해주(海州)에 우뚝 선 고려 사신의 숙소(고려정)를 보고 “처마와 기둥이 춤을 추며 담장 밖으로 날아오르고, 농가의 숲은 도끼 자국 뿐이로구나. 오랑캐에게 다 주어 노비가 되게 했으니 나 몰라라. 그들에게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한탄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동파는 “고려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이 10만 관도 넘는다”면서 ‘고려와 절대 상종할 수 없는’ 5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밝혔다.

이것이 소동파의 이른바 ‘오해론(五害論)’이다.

“첫째 고려가 바치는 공물은 허접한 물건인데 반해 송나라가 지출하는 경비는 백성들의 고혈이다. 둘째 고려 사신들이 닿은 곳마다 백성들과 말, 기물 등을 징발하고 영빈관을 수리해야 한다. 셋째 고려가 송나라로부터 받은 하사품을 분명 거란에 넘겨줄 것이다. 이것은 도적에게 무기를 빌려주고 식량을 대주는 것이다.”(1093년의 ‘고려의 서적수매에 따른 이익과 손해에 대한 상소문’)

소동파는 이어 “고려사신이 수집한 송나라의 모든 정보가 거란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 뻔하며”(넷째), “훗날 거란이 송나라와 고려의 교섭을 트집 잡는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다섯째)이라고 주장했다. 소동파는 “선물을 가져온 고려 사신들을 빨리 추방시키라”고 앙앙불락한다.

고려-조선 지식인들의 숭배대상이던 소동파는 “사람 옷 입은 원숭이(胡孫·고려)가 사람(중국)을 농락한다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거침없는 혐한 발언을 쏟아냈다.|국립중앙도서관 자료

■거란의 앞잡이 오랑캐

그런 소동파를 이해할 수 있을까. 소동파는 “고려 사신 대접에 쓰이는 돈(10만관)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을 구휼한다면 최소한 몇 만 명은 살릴 수 있을 것”(1089년 12월 3일의 상소문)이라 주장했다. 아닌게 아니라 소동파는 1089~1092년 사이 항주·영주·양주 지주(知主·도지사)로 근무하면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들을 목도했다. 소동파는 1085년 등주 지주로 부임하던 중 해주에 호화롭게 우뚝 선 고려 사신의 숙소(고려정)를 보고 한탄하는 시를 남겼다.

“처마와 기둥이 춤을 추며 담장 밖으로 날아오르고, 농가의 숲은 도끼 자국 뿐이로구나. 오랑캐에게 다 주어 노비가 되게 했으니 나 몰라라. 그들에게 얻은 것이 무엇인고.”(<소식시집>)

“1084년 고려사신 숙소(고려정)를 지으라는 황명을 내리자 해주 등 두 고을에는 심한 동요가 일었다. 도망치는 백성들도 있었다. 이듬해(1085년) 내가 그곳을 지나다가 호화로운 고려정의 모습에 탄식해서 시 1수를 남긴다.”(<소식시집>)

소동파는 고려 사신들을 위한 ‘호화 영빈관’ 공사를 위해 고통받고 있던 송나라 백성들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993년 거란의 침공을 서희의 세치 혀로 겨우 막아낸 고려는 이듬해 6월 송나라에 밀사를 보내 거란 협공을 제의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이제 겨우 변방이 안정되었으니 가벼이 움직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규장각한국학연구원 자료

■뿌리깊은 중화사상

그러나 백번 양보하더라도 고려를 향한 소동파의 적개심은 지나치다. 무엇보다 고려가 거란의 앞잡이라고?

천만의 말씀이었다. 993년(고려 성종 12) 10월 거란(요나라)의 침공을 받은 고려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병을 요청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거란의 눈치를 보느라 응하지 않았다. 고려는 할 수 없이 송나라와 관계를 끊었다.

이후에도 고려는 끊임없이 거란과 샅바싸움을 벌이면서 송나라와의 동맹을 타진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고려의 요청을 거부했다. 만약 송나라가 고려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합해서 거란과 맞섰다면 거란의 국력은 크게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소동파는 “오랑캐는 중국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만약 따뜻하게 대해주면 다시 탐욕스런 마음을 발공하여 우환거리가 될 것”(소동파 전집>)이라 했다.

소동파의 뿌리깊은 중화사상도 한몫 했다. 소동파는 “오랑캐는 중국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 만약 따뜻하게 대해주면 다시 탐욕스런 마음을 발동하여 우환거리가 될 것”(소동파 전집>)이라 했다.

그러나 소동파의 과거시험(진사과) 동기생이자 같은 당송팔대가 중 한사람인 증공(1019~1083)은 어떠한가.

“고려는 문장에 통달하여 지식이 있으므로 덕으로 품어야지 힘으로 굴복시키기는 어렵다…고려사신이 예물로 바친 것이 돈 30만관이나 되는데…고려의 국력을 헤아려볼 때 여유롭지 못하다.”(<증공집> 권35 ‘명주의사고려송유장’)

증공은 한발 더 나아가 “고려의 사정을 감안해서 지금까지 받은 돈 10만관을 돌려줘야 한다는 조칙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시대 지식인으로써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단 말인가.

소동파와 동시대 인물인 증공은 “고려는 문장에 통달하여 지식이 있으므로 덕으로 품어야지 힘으로 굴복시키기는 어렵다”면서 “고려사신이 예물로 바친 것이 돈 30만관이나 되는데, 황제의 조칙으로 되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국사편찬위원회 자료

■고려가 무슨 죄라고?

운양 김윤식(1835~1922)만이 소동파의 이런 편협한 시각을 꼬집고 있다.

“소동파는…유독 고려에 대해서 시샘이 너무 깊고 방어가 너무 엄격하다…천하의 8/10을 소유한 송나라가 두 오랑캐(요·금나라)에게 공물을 바쳤으니 욕되지 않은가…그런데 소동파는 유독 고려의 사신만을…배척하고…”

운양 김윤식은 소동파가 편협한 시각으로 유독 고려만 들들 볶고 있다고 비판했다. 김윤식은 “송나라는 천하의 10분의 8을 차지했으면서도 두 오랑캐 나라(요와 금)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았느냐”고 아픈 곳을 찔렀다. 김윤식은 “속좁은 소동파야말로 불인하고, 용맹스럽지도 않으며. 현명하지도 않다”고 비판했다.|국립중앙도서관 자료

김윤식은 “소동파는 덕으로 말한다면 불인한 것이요, 위엄으로 말한다면 용맹스럽지 못한 것이요, 지혜로 말한다면 현명하지 못한 것”이며 “가소롭기 짝이 없다”(<운양집> 권15 ‘잡저 논고려매서이해차자’)고 소동파를 비판했다.

필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김윤식처럼 소동파의 왜곡된 ‘고려관’을 꼬집고 비판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소동파의 잇단 ‘혐한 발언’을 모를리 없는 고려~조선의 지식인 사회는 왜 가만있었을까. 아니 가만있다못해 왜 소동파를 무한 짝사랑하며 ‘따라쟁이’를 자처했을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기사를 위해 유보은 세종문화회관 전시팀 과장, 김현권 대구간송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영규 성균관대 교수가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참고자료>

유보은, ‘조선시대 서원아집도 연구’, 고려대 석사논문, 2006

조규백, <한국 한문학에 끼친 소동파의 영향>, 명문당, 2011

김현권, ‘조선후기 문화변동과 소식의 이해-서화를 중심으로’, <동국사학> 64권64호,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8

류종목, ‘소식과 고려’, <중국문학> 38권, 한국중국어문학회, 2002

류소진, ‘조선문인 서거정의 생활 속에 투영된 소식‘, <중국어문학지> 60권60호, 중국어문학회, 2017

이근명, ‘소식 고려 관련 논설의 역주(2), <중국사연구> 98집, 중국사학회, 2015

국가유산청, ‘동산 국가유산 분과 위원회 1차회의록’, 2024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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