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오는데, 물막이판 없는 반지하 8000가구
지난 25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빌라 밀집 지역. 2022년 여름 집중호우로 일가족 3명이 사망한 반지하 주택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골목마다 반지하 주택 한두 곳은 침수를 막아줄 물막이판이 없는 상태였다. 주민들은 이번 주말부터 시작된다는 장마 예보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반지하에 거주한다는 60대 주민은 “구청에서 신경을 쓰고, 우리 집도 (물막이판을) 설치했지만, 몇몇 집은 집주인이 반대한다고 하더라”며 “올여름 비 많이 온다던데 2년 전처럼 집이 물에 잠길까 걱정”이라고 했다.
반지하 주택은 여러모로 주거 환경이 열악하지만, 집중호우 때 창문이나 계단을 통해 실내로 물이 들어차기 일쑤다. 서울에서 침수 우려가 있는 세 집 중 한 집은 최소한의 피해 예방 장치인 물막이판도 없는 상태다. 5월 말 기준 서울 2만3104가구 중 8004가구(34.6%)에 물막이판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물막이판 같은 침수 방지 시설 설치는 집주인 동의가 필수인데, 적잖은 집주인이 ‘침수 주택 꼬리표’를 우려해 물막이판 설치를 꺼리는 탓이다.
2년 전 신림동 반지하 참사를 계기로 정부와 서울시는 침수 위험에 취약한 반지하 주택을 주거용으로 사용하지 않고, 반지하 주민 이주를 지원하는 각종 정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나도록 정책 효과는 미미하다. 반지하 주택을 공공(公共)이 사들여 용도를 변경하거나 철거하는 계획은 부족한 인센티브 탓에 참여가 저조하다. 정부·지자체 지원을 받아 공공임대로 이주한 반지하 가구는 서울시 전체 반지하 가구의 2.5%에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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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서울시는 20만 가구가 넘는 반지하 주택을 차례로 없애겠다며 반지하 주택 거주민을 위한 지원·이주 대책을 내놨다. 대표적인 것이 반지하 주택 거주민이 공공임대주택으로 옮길 때 보증금과 이사비 등을 지원하는 ‘주거 상향 이주지원’ 사업이다.
26일 서울시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에 따르면, 반지하 주택에 살다가 공공 임대주택으로 이주한 경우는 5527가구에 그친다. 서울시 반지하 전체 가구(약 22만 가구)의 2.5%, 침수 이력이 있는 가구(1만9700가구)의 28%에 불과하다. 지자체나 LH 등에서 반지하 주민에게 공공임대 이주를 권유해도 직장에서 멀어지거나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고령층은 오래 살았던 곳을 떠나기 어렵다며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공공임대가 아닌 일반 지상층 주택으로 이주할 때 매달 20만원씩 최장 6년간 월세를 지원하는 ‘반지하 특정바우처’ 사업도 신청 실적이 저조하다. 작년 10월 신청 대상을 침수 우려 가구에서 전체 반지하 가구로, 지원 기간도 2년에서 6년으로 늘렸지만, 현재까지 신청 가구는 967가구에 그친다. 월세를 일부 지원받는다고 해도 지상층으로 이주하면 부담해야 하는 월세가 배(倍)로 늘기 때문이다. 관악구 신림동 반지하 주택 월세는 보증금 1000만원 기준으로 30만~50만원 수준이지만, 지상층은 60만~100만원에 달한다.
LH나 SH(서울주택도시공사) 같은 공공기관이 반지하 주택을 사들여 지역 내 커뮤니티 시설로 용도를 변경하거나, 철거·신축해 임대주택으로 활용하는 ‘반지하 주택 매입 사업’은 소유주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2022년 사업을 시작한 이후 지난달까지 매입을 마친 주택은 561가구에 불과하다. 반지하 주택 집주인이나 건물주가 공공에 집을 팔아야 할 효용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감정평가를 통해 매입가를 결정하는데, 대부분 소유주의 기대치보다 턱없이 낮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반지하 퇴출은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는 만큼 침수 피해 방지에 행정력을 집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조주현 건국대 명예교수는 “정부와 지자체가 배수 체계 정비와 물막이판 설치 독려 방안 등 당장 침수 피해를 막을 방안에 집중하고, 반지하 주택은 재개발을 통해 자연적으로 소멸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맞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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