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미국에 있지만 한국엔 없는 ‘여름 국회 회동’
여야·지역·인종 넘은 화합 보여줘
고성과 막말로 지새우는 韓 국회
잠시라도 서로 존중할 순 없는지
올해 미국 상원의 시어서커 데이(National Seersucker Day)는 지난 13일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의 ‘화창하고 따뜻한 날’에 민주·공화 양당 의원들이 시어서커(오돌토돌한 촉감의 여름 옷감)로 지은 옷을 입고 함께하는 자리다. 시어서커는 화사하고 청량하다. 의장을 맡아 2014년부터 행사를 이끌고 있는 공화당 빌 캐시디 의원이 배포한 사진도 한결 산뜻한 분위기였다. “상원 의원들이 칙칙한 양복에 빨간색 아니면 파란색 넥타이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란 걸 보여주자”(1996년 트렌트 로트 의원)던 발족 취지 그대로다.
외국 의회에서 나온 사진을 보면서 지금 우리 국회에서 사라진 많은 것들을 생각한다. 우선 화합이다. 올해 시어서커를 입은 의원은 모두 9명이다. 공화당이 5명, 민주당이 4명이고 여성이 5명, 남성이 4명이다. 지역구로 보면 미국에서 시어서커의 본고장에 해당하는 남부(루이지애나·미시시피·조지아) 외에도 동부 뉴잉글랜드(뉴햄프셔·메인)나 알래스카도 있다. 유일한 유색인종인 라파엘 워녹(민주당) 의원이 올해부터 공동 의장을 맡는다. 이날만큼은 여야가 정파, 성별, 지역, 인종을 초월해 어울리는 것이다.
실제로 조지타운대가 법안 여야 공동 발의 실적을 토대로 산출하는 ‘루가 초당파(超黨派) 지수’(Lugar Bipartisan Index)에서 이날 함께한 의원 중 7명이 상위 20위에 들었다. 워녹 의원은 상대 당 캐시디 의원의 공동 의장직 제안을 수락하면서 “이 행사는 멋진 여름 옷감에 대한 애정을 통해 미국인을 단결시킨다”고 했다. 캐시디와 워녹은 8월까지 매주 목요일을 ‘시어서커 목요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공동 발의했다. 단결은 거창한 곳에만 있지 않다.
다음은 선견지명이다. 캐시디는 워싱턴포스트(WP)에 “500년 뒤 인류학자들은 왜 사람들이 더운 여름에 이걸 안 입고 모직 옷을 입었는지 의아해할 것”이라면서 시어서커를 입는 것이 “환경에 맞서지 않고 순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했다. 기후 변화 때문에 시작된 행사는 아니지만 온난화가 갈수록 심해지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모두의 미래가 걸린 문제 앞에서 눈앞의 잇속을 떠나 의제를 제시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것도 정치인의 중요한 역할이다.
시어서커의 날은 또한 전통을 존중하고 지켜나가는 자세를 보여준다. 미 상원 웹사이트의 ‘전통과 상징’ 코너에 따르면 이 행사는 에어컨이 없던 20세기 초에 남부 출신 의원들이 여름이면 프록코트(무릎까지 내려오는 남성 정장용 외투) 대신 시어서커를 입고 워싱턴DC의 동료 의원들에게도 소개했던 일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트렌트 로트 의원이 1996년에 정례 행사로 부활시켰고, 2012·2013년 중단됐다가 2014년부터 캐시디가 주도해 오고 있다. 지난해 별세하기 전까지 공동 의장을 맡았던 다이앤 파인스타인(민주당)이 상원의 여성 동료들에게 시어서커 슈트를 선물하면서 여성 의원들의 참여도 늘었다. 100년 전 선배들의 모습에서 좋은 뜻을 발견하고 가장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방법을 함께 고민하며 발전시켜 나간다.
누군가는 시시하고 실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 현실이 엄중하지 않아서, 한가해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아니다. 드레스코드도 엄연한 공감대(共感帶)다. 작은 공감대가 더 중요한 일을 함께할 발판이 된다. 적수(敵手) 앞에서 유머와 품위를 잃지 않으려면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필요하다. 여유는 여유 있을 때 생겨나는 게 아니라 애써 만드는 것이다. 고성, 막말, 조롱, 모욕, 꼼수, 독선, 저급(低級)과 부도덕이 일상이 돼버린 우리 국회의 정치인들에게 그 한 뼘의 여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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