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묵의 90년대생 시선] 민희진 이어 정병기… K팝 프로듀서를 주목한다
‘뉴진스’ 보며 민희진, ‘에스파’ 보며 이수만… 창작자 의도에 관심
대중은 이제 ‘장막 뒤 존재’ 소환 시작… K팝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2년 전, 모드하우스라는 신생 연예 기획사에서 아이돌 프로젝트 tripleS(트리플에스)를 시작한다고 했을 때 많은 K팝 팬들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K팝 시대를 열었다는 원더걸스의 데뷔곡 Tell Me로 시작하여 숱한 아이돌 기획에 참여해온 정병기 프로듀서가 대표를 맡아 무려 24인조 걸그룹을 만들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정병기 대표는 K팝 팬들 사이에서 자신의 미학을 쏟아부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드는 K팝 장인인 동시에, 지나치게 난해한 시도를 과감히 실험하는 ‘무모한 도전자’의 이미지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2년에 걸쳐서 스물네 명의 멤버를 차례로 공개하며 나아가는 여정은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프로젝트가 제대로 지속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우려도 컸다.
하지만 2년의 여정 끝에 24인조 완전체 앨범인 ASSEMBLE24가 발매되자, 시장이 본격적으로 반응했다. 타이틀곡인 Girls Never Die는 멜론 차트 TOP100 32위까지 진입했으며, 유튜브 뮤직에서는 16위까지 기록했다. 앨범 초동 판매량도 15만 장을 달성했고, 음악 방송 더 쇼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신생 중소 기획사의 과감한 실험에 대중이 화답해준 것이다. 이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첫째 이유로는 뮤직비디오의 연출과 곡의 메시지를 들 수 있다. 전통적으로 K팝은 시각, 청각 가릴 것 없이 모든 감각을 극대화하여 환상의 세계를 연출해오면서 성공했다.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미형의 존재들이 표현하는 열정과 행복을 보며 열광했다. 오죽하면 ‘영상 속 아이돌이 너무 아름다워 현실의 내가 비참하게 보인다’는 말도 심심찮게 나올 정도다. 그런데 트리플에스는 완전히 다른 전략을 채택했다. 이전부터 이들의 뮤직비디오는 일관되게 대도시 공간에서 청소년과 청년들이 느끼는 억압과 일탈, 불안을 묘사했다. 뮤직비디오의 배경도 대개가 우리네 대다수가 매일을 살아가는 칙칙한 콘크리트 숲이라서 일상성이 돋보인다.
Girls Never Die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뮤직비디오 속 멤버들은 게임을 하다 손등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환상을 보거나, 폭식을 하거나, 욕조의 물속에서 질식해보려 한다. 심지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과격한 연출도 있다. 우울증을 정면으로 다루며 뮤직비디오는 주로 청소년들이 느끼는 심리적 위기와 어두운 그늘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 결과 다른 여느 뮤직비디오보다 트리플에스가 훨씬 더 절실하게 와닿게 된다는 평을 얻었다. ‘다시 해볼까’라는 내레이션으로 상징되는 연대를 통한 치유와 극복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K팝 팬들이 아이돌을 볼 때 그 이면에 있는 프로듀서에 적극적 관심을 표하는 최근의 경향은 트리플에스 흥행의 둘째 이유다. 이제 사람들은 뉴진스를 볼 때 그룹을 총괄 지휘하는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모습을, 에스파의 독특한 ‘광야’ 세계관을 볼 때는 이수만 전 SM엔터테인먼트 의장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사람들이 K팝 아이돌을 기획자와 아이돌이 상호작용하여 내놓는 일종의 ‘작품’으로 인식하면서,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창작자의 의도와 표현 기법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러블리즈, 이달의 소녀 등을 통해 프로듀서로서 확보한 정병기 대표의 브랜드 가치는 불안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가자는 Girls Never Die 뮤직비디오의 표현과 메시지에 사람들이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유도했다.
그런 의미에서 K팝 산업에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이돌이 아티스트냐 아니냐’는 K팝을 둘러싼 가장 뜨거운 논쟁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그런 논쟁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민희진 대표나 정병기 대표가 다음에는 어떤 작품을 대중에게 선보일지 촉각을 기울인다. 물론 이것이 복제 가능한 모델인지는 아직은 판단하기에 이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제는 대중들이 ‘장막 뒤의 존재’들을 인식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자 소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획자와 아이돌이 만들어내는 K팝 특유의 표현이 어디까지 진화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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