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앞으로 앞으로 가지 않는 사회

기자 2024. 6. 26. 20:3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마침 6·25여서 그런지 이런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라떼는’ 이야기가 멋쩍지만 1970년대 여자아이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고무줄놀이를 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1950년 9·28 서울수복 직후 명동에서 마주친 작사가 유호와 작곡가 박시준이 서로 무사함을 확인하고 반가운 나머지 밤새 술을 마신 뒤 만든 노래라고 한다. 참혹한 전쟁 와중에서도 승기를 잡았다는 희망이 느껴지는 이 노래를 어렸을 때 우리는 고무줄놀이의 승자가 되겠다는 심정으로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는 일은 전쟁이 아닌 평화로운 일상에서도, 폐허를 딛고 세계에서 손꼽는 부자가 된 나라에서도 계속된다. 노래 가사가 떠오른 이유는 6·25 때문이라기보다 화성의 리튬전지 공장에서 일어난 참사 소식 때문이다. 몇년 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이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을 때 한 방송사는 ‘일하다가 죽지 않게’라는 인상적인 구호를 내걸었는데 여전히 일하다가 죽는, 전쟁 같은 노동이 반복되고 있다. 더구나 이번 사망자 대부분이 재중동포 여성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재해가 어김없이 가장 소외된 취약계층을 덮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오래전 뉴스가 이 일과 겹쳐진다. 2013년 방글라데시 의류산업 노동자들이 일하는 8층짜리 건물 라나플라자가 무너져서 1129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의류산업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으로 기록돼 있다. 그렇지만 같은 해, 방글라데시에 제조회사를 둔 미국의 패스트패션 브랜드는 역대 최고 이익을 기록했다.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들의 죽음을 담보로 품질 좋고 값싼 공산품이 만들어진다는 건 이제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과 10여년 전 방글라데시가 그리 다르지 않다. 안전교육을 받지 않은 일용직 외국인 노동자를 데려다가 쓴 이유는 임금이 낮기 때문이다.

우연이지만 사고가 터진 날, 한국소비자원발로 보도된 기사는 시중에서 판매하는 알카라인 배터리의 가성비 비교 결과를 알려준다. 14개 제품 가운데 다이소가 중국에서 수입한 배터리가 가격 대비 지속시간이 가장 길다는 것이다. 가성비란 결국 생산단가를 낮추는 일이고 그 안에는 노동 착취도 들어있다. 우리가 싼 가격으로 좋은 물건을 많이 소비하는 동시에 노동자들이 일하다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별로 설득력이 없다. 참사를 막는다는 것은 제값을 치러야 한다는 뜻이다. 안전한 건물과 설비를 구축하고 안전점검과 안전교육을 실시하는 데는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경제성장을 위해, 결국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위해 전쟁처럼 살아왔던 지난날을 벗어나자고 그토록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람의 목숨보다 경제적 이익을 앞세우는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용산참사의 비극, 세월호의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가는 상황은 끝나지 않는다. 이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제대로 적용하거나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생명을 지키는 일이 물건값을 제대로 치르고 소비를 줄이는 데 달려있다는 점을 사회 전체가 자각하는 일이 필요하다. 아직 충분히 소비하지 못하는 계층과 낙수효과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 나오겠지만 일상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전체 소비를 줄여야 할 때다.

한 세대 전쯤, 페미니스트들은 왜 여성의 가사노동에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지 질문함으로써 놀라운 발견으로 나아갔다. 사회에서 직업으로 인정받는 생산 노동의 아래에는 여성의 돌봄(재생산) 노동, 자연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자급 노동, 정치·경제적 식민지와의 불평등한 교환 그리고 자원 창고이자 폐기물 처리장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착취라는 지층이 켜켜이 들어있으며 이 모든 것이 산업 생산을 떠받친다. 지금 우리는 비숙련 외국인 노동자와 자연에 이르기까지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의무를 부여받고 있다.

생명을 중히 여기지 않거나 지켜주지 못하는 곳에 생명이 깃들 리 없다. 사회적 참사가 쌓일수록, 그것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채 덮일수록 죽음의 문화가 지배한다. 젊은이들이 아이를 안 낳는 이유는 삶보다 죽음을 가깝게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지원금이나 육아휴직만으로 해결할 순 없다. 최근 윤석열 정부가 인구감소를 국가비상사태로 선포했지만 아무런 울림을 주지 않는 것은 인구와 사람을 분리하기 때문이다. 인구란 사람의 총합이 아니라 집단으로서의 생산자, 납세자, 소비자, 피부양자를 가리킨다. 사람의 생명을 우선시하는 사회는 참사를 대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한윤정 전환연구자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