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17년 전 이맘때
얼마 전 경기도 안성의 봉업사지에 갔다. 한데 그날 그곳이 사적으로 지정된다는 뉴스가 나와서, 사적 지정 기념 답사가 됐다고 일행과 키득대며 절터를 둘러보았다. 봉업사지에는 10세기 고려 광종대 만들어진 태조 진전, 즉 태조의 초상화나 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던 곳이 있었다. 1362~1363년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으로 안동까지 피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곳을 참배하기도 했다. 그후 언젠가부터 버려져 잊혔으나 우연히 발견된 유적을 계기로 발굴조사가 행해지며 사적으로 지정됐다.
고려 광종 때 건설된 태조 진전이라 하면, 개성의 봉은사가 대표적이다. 태조상이 바로 이곳에 있던 것이다. 조선 건국 후 태조릉인 현릉에 묻혔는데, 1990년대 현릉 정비 과정에서 발견됐다. 태조상과 진전 생각을 하다 보니, 개성 만월대, 즉 고려궁성의 경령전 유적에 생각이 미쳤다. 경령전은 궁성 안에 있던 진전이다. 고려 왕실에서 꾸준히 의례를 행한 매우 중요한 장소인데, 2007~2018년 남북 공동 발굴조사를 통해 정확한 유구가 확인되었다.
고려궁성 발굴 때, 운 좋게도 이곳에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맨 처음 간 것은 2007년 6월 이맘때이다. 개성공단 설치를 계기로 그해 5월부터 고려궁성 터에 대한 남북 공동 시굴조사가 시작됐는데, 개성과 궁궐 관련 연구를 한다는 인연으로 자문단에 속해 방문했다. 북한을 처음 가본다는 것만으로도 설레는데, 논문을 쓴 그 고려궁성의 땅을 직접 밟게 되다니! 아직도 창덕궁 옆에서 단체 버스를 타고 개성으로 가던 길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확 달라진 풍경이 어찌나 이국적이던지. 나지막하게 펼쳐지는 민둥산이 흡사 사바나에라도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국적인 풍경에 비해, 처음 만난 북한 사람들은 그렇게 낯설진 않았다. 말이 통한다는 점이 주는 안온함이 예상보다 컸다.
시굴조사 현장에서의 흥분도 기억난다. 시험적으로 발굴을 시작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글자가 있는 기왓장, 특이한 모양의 청자가 발굴됐고 훌륭한 솜씨의 비석 받침대도 발견됐다. 남은 게 별로 없을 줄 알았던 건물 터 역시 축대는 물론 상당한 유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 자리에 모인 모든 학자들은 달뜬 목소리로, 당연히 정식 발굴에 들어가야 하고 궁성의 경계를 확인할 때까지 장기간에 걸쳐 꾸준히 진행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때만 해도 사료 부족으로 허덕이는 고려시대사 연구에 새로운 장이 열릴 것만 같았다.
개성공단 가동이 갑자기 중단되면서 2018년을 끝으로 공동 발굴도 중지됐다. 그 이전에 몇 번이나 국내 전시에도 나온 태조상은 2018년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전시에도 나오지 못했다. 남북관계가 좋았다면, 봉업사지의 사적 지정을 기념해 봉은사 태조상과 함께 고려의 진전 문화를 가지고 새로운 전시나 학술대회를 기획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홍건적의 난과 공민왕의 피란 같은 주제로 안동, 안성, 청주, 논산, 개성, 김시습의 <금오신화>까지 연결하여 전쟁, 역모, 왕권, 민간의 피해 등을 연결하는 거대한 스토리텔링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신나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늘어놓으니, 일행이 타박했다. 지금 정세를 보라며,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냐고 말이다. 하, 그런가.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국제정세가 암울한 시점에 군대 갈 아들까지 두고서도, 태조 진전이나 생각하는 나는 역시 세상 물정 모르는 오활한 학자인가. 그렇지만 이런 때일수록 끊겨 버린 과거의 길을 기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에 다시금 17년 전 이맘때의 흥분을 되씹는다. 그때를 그리워하거나 감상에 빠지고 싶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를 되새기는 것은 새로운 미래,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다. 74년 전의 아픔을 떠올린다면, 더욱 이런 적극적인 ‘기억하기’와 ‘상상하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장지연 대전대 역사문화학 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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