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너그러움·친밀함, 유전자에 남은 생존의 지혜
1938년, 500마리의 붉은털원숭이를 실은 배가 인도를 출발해 대서양 건너 푸에르토리코의 카요 산티아고라는 작은 섬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다. 이들은 영장류의 사회생활과 성적 행동 연구를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의 주요 관찰 대상자로 선정되어 강제이주 중인 상태였다. 편한 여행길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수의 원숭이들이 선상에서 목숨을 잃을 정도로 가혹한 여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일부는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작은 섬 카요 산티아고는 곧 ‘원숭이섬(Monkey Island)’이 되었고, 이곳은 영장류 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인위적이지만 더없이 이상적인 연구실로 자리 잡았다.
위기가 닥친 것은 2017년이었다. ‘마리아’라는 이름의 거대한 허리케인이 이 지역을 강타했던 것이다. 자애로운 성모에게서 유래된 이름답지 않게 마리아는 흉폭했다. 푸에르토리코에서만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국민의 절반이 이재민이 되었으며, 피해액의 규모는 900억달러가 넘었다. 마리아가 지나간 지역은 그야말로 폐허가 되었고, 그건 원숭이섬 역시 마찬가지여서 며칠 만에 섬을 이루던 숲의 3분의 2가 사라졌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섬의 원숭이들은 대부분 살아남았지만, 연구자들은 앞으로가 걱정이었다. 환경이 열악해질수록 아귀다툼이 늘어나며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모두 공멸하는 일이 인간의 역사에서는 비일비재했기에, 인간과 유전적 친척인 원숭이들 역시 비슷한 행태를 보일지도 몰랐다.
학자들은 태풍 이후 생존한 원숭이 집단을 연구하면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한 가지는 끔찍한 재난의 경험이 원숭이의 건강에 영향을 미쳐 노화를 촉진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사실이었다. 일리노이대학교 연구진은 유전자 조사를 통해 생존 원숭이들은 염증을 일으키는 유전자들의 발현율은 높아지고, 체내 단백질이 제 기능을 하도록 돕는 유전자들의 발현은 줄어들어, 태풍 이후로 생체 나이가 순식간에 두 살씩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평균 수명이 약 25년인 원숭이에게 있어 2년이란 사람에게는 7~8년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종종 전쟁이나 끔찍한 재난을 겪은 사람들은 이전보다 훨씬 지치고 나이 들어 보이곤 하는데, 이는 실제로 노화에 관련된 유전자 발현이 달라져 일어나는 생리적 현상이며, 원숭이 역시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드러난 사실은 다소 뜻밖의 결과였다. 허리케인 이후, 원숭이들은 오히려 다른 원숭이들에게 더 관대해졌고, 더 사회성이 좋아진 것이었다. 지난주 발간된 사이언스지의 표지를 장식했던 원숭이들의 다정한 사진은 바로 이를 관찰한 미국 펜실베이니아 연구진의 연구 결과다. 북위 18도의 저위도 지역에 위치한 푸에르토리코는 1년 내내 더운 지역이라 이곳의 원숭이들에게 먹이만큼이나 생존에 중요한 것이 바로 뜨거운 직사광선을 막아주는 나무 그늘이었다. 허리케인으로 인해 숲이 초토화되면서 더위를 식힐 그늘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자, 좁아진 그늘을 몇몇 힘센 원숭이들이 독차지하거나 혹은 누가 그늘을 차지하느냐를 두고 격렬한 싸움이 일어날지 몰라 걱정이 되었다. 가뜩이나 섬의 생태계가 붕괴하면서 먹잇감도 부족해진지라, 그늘을 두고 자리다툼까지 일어난다면 사태는 더욱 최악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원숭이들이 보여준 모습은 사람들의 걱정을 기우로 만들었다. 그늘 아래서 원숭이들은 서로 간의 거리를 좁혀 앉아서 다른 원숭이들에게 기꺼이 곁을 내주었고, 상호 친밀함의 지표였던 털고르기 상대의 수를 늘려 이전에 비해 더 많은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부족해진 자원을 독차지하고자 아귀다툼을 벌이는 대신, 조금씩 양보하고 더 친밀하게 지내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원숭이들이 열악한 환경에 대한 대처법으로 독점 대신 양보를, 고립 대신 친목을, 경쟁 대신 공존을 선택했다는 것이 인간의 입장에서는 언뜻 현명한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원숭이 개체의 너그럽고 다정한 행위들은 결국 원숭이 집단 전체의 생존력을 월등하게 높여서, 몇년 만에 집단의 구성원들이 허리케인 직전에 비해 5% 이상 늘어나기에 이른다. 얼핏 어리석어 보이던 행동이 사실은 가장 전략적인 선택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들은 수십억년의 진화 과정에서 자연이 유전자에 아로새겨준 태초의 지혜마저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닐까.
이은희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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