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소환한 대정전 악몽 …"예비전력 1.5GW 사수하라"

2024. 6. 26. 17:4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실전 방불케한 한전 블랙아웃 대비 비상훈련 르포
태양광 40% 있는 호남 흐리고
수도권 폭염 때가 최악 상황
원전 1기 멈추면 바로 대정전
'경계 → 심각' 긴장 최고조로
최대전력 수요 해마다 증가
작년 기록 올해 여름 깰수도
올 전력피크 8월 둘째주 예상

◆ 기후공습 ◆

지난 25일 오후 4시 한국전력 전남 나주 본사 지하 1층 재난종합상황실. 전력 수급 비상사태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리자 정상준 상황실장 등 10여 명의 직원이 뛰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전국 15개 지역본부 비상 근무자들도 상황실 앞 대형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다. 갈수록 길어지는 폭염 기간에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대정전(블랙아웃)을 막기 위한 비상훈련 상황이다. 상황실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정 실장은 "현 시각부로 수급 비상 '관심' 단계가 발령됐다"며 "관심 단계 조치사항을 신속히 이행하고 결과를 즉시 보고해 달라"고 지시했다. 비상근무 직원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이후 팀별 보고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수요2팀 직원은 "냉방기기 원격제어를 시행해 약 50㎿의 예비력을 확보했다"며 "긴급 절전에 대비해 131가구 약정 고객에게 사전 안내를 실시하겠다. 약정량은 650㎿에 달한다"고 보고했다.

오후 4시 20분. 다급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받은 수요1팀 직원이 "예비력이 2500㎿ 미만으로 떨어져 전력거래소에서 수급 비상 '경계' 단계를 발령했다"며 상황실장에게 보고했다. '준비-관심-주의-경계-심각' 등 전력 수급 비상 5단계 중 '경계' 단계에선 적색비상이 발령되고 부하 차단(순환정전) 안내가 이뤄진다. 순환정전은 강제로 일부 지역에 전기 공급을 막는 조치다. 전체 전력망이 다운되는 블랙아웃이라는 최악의 대정전 사태가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다.

지난 25일 한전 나주 본사 지하 1층 재난종합상황실에서 직원들이 올여름 전력 수급 긴급 상황에 대비해 '전력 수급 비상훈련'을 하고 있다. 한국전력

이날 시나리오상 경계 단계까지 상황이 악화된 건 태양광 발전기가 밀집한 남부 지역에 구름이 끼어 태양광 발전량이 800㎿ 급감한 게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게다가 원전 1기 규모의 석탄발전소가 가동을 멈추면서 1040㎿도 펑크가 났다. 3884㎿였던 예비력은 순식간에 2044㎿까지 곤두박질쳤다. 여기서 원전 2기에 추가 문제가 발생하면 대정전 사태가 벌어진다.

가상의 훈련 상황 시나리오지만 향후 이상기후가 악화될 경우 현실화할 수 있는 미래다. '약한 고리'는 태양광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전체 태양광 발전 설비 규모는 23.9GW로 원전 약 20기 규모에 달한다. 이 중 42%인 10GW 발전기가 호남에 집중됐다. 호남은 흐리거나 비가 오는데 전력 사용이 많은 수도권에 폭염이 지속되면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또 하나 변수가 있다. 폭염에 열돔현상이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고 최고기온도 치솟는 경우다. 고장 나거나 정비 중인 발전기를 빼고 올여름 가동할 수 있는 발전기 총량이 104.2GW인데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면 블랙아웃이 올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난해 영국 옥스퍼드대와 브리스틀대 연구팀이 네이처에 실은 논문을 보면 지구 평균기온이 1.5~2도 상승할 경우 한국의 냉방에너지는 지금보다 10.6% 더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올여름 최대 전력 수요는 8월 둘째 주 92.3~97.2GW에 이를 전망인데, 10%가 추가되면 단숨에 100GW를 넘게 되면서 비상 단계가 '관심'으로 올라간다.

전력당국의 최대 전력 수요 예측이 빗나갈 수 있다는 공포감도 없지 않다. 역대 최악의 '대정전'으로 불렸던 2011년 9월 15일 사태는 사실 정부가 순환정전에 나선 것이다. 8월 전력 피크 이후 상황이 종료됐다고 판단한 발전사들이 발전기 정비에 많이 들어갔는데 갑자기 수요가 몰리자 발생했다. 당시 블랙아웃을 막기 위해 한전은 일부 지역 전기를 끊었다. 접수된 피해 신고만 9000건, 피해액은 610억원에 달했다. 올해도 전력당국은 8월 둘째 주 오후 5시께 전력 수요가 최대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지만 9월까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남호 산업부 2차관은 26일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경기 신가평 변전소를 방문했다. 최 차관은 "올여름은 평년보다 무더울 것으로 전망돼 전력 수요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전력설비를 철저히 관리해 전력 피크 시기에도 전력 공급에 이상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달라"고 말했다.

[문지웅 기자]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