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못 버티면 후배들은 기회 없을 거라 생각했죠”···여성 최초 ‘소방감’ 이오숙 전북소방본부장[플랫]
“후배들 길을 터주면 좋겠네.”
이오숙 전북소방본부장(57)이 2009년 대전 동부소방서 구조구급계장으로 근무할 당시 소방방재청 전입 제의를 받으면서 들었던 말이다. 이전까지 방재청(현 소방청) 본청에 여성 간부는 없었다. 방재청 소방장비과로 배치된 그는 본청에서 근무하는 사상 첫 여성 간부(소방경-일반직 6급 해당)가 됐다. 그는 “못 버티면 후배들에겐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임했다”고 했다.
그는 지난달 여성 최초로 소방감(일반직 2급 상당)으로 승진하며 전북소방본부장에 임명됐다. 7만여 명의 소방공무원 중 그보다 높은 사람은 이제 소방청장을 포함 5명뿐이다. 그는 ‘첫 여성 소방청 대변인’, ‘대구·경북 최초의 여성소방서장’, ‘대전·충남 최초의 여성 119안전센터장’이기도 했다.
공무원 조직 중 남성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 소방이다. 가장 두꺼운 ‘유리천장’을 깨뜨려 온 그를 지난 21일 전북소방본부에서 만났다.
그는 “의용소방대장이었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1988년 소방공무원이 됐다”고 말했다. “사람들을 모아 산불 현장으로 달려가던 아버지”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발령받은 부서에서 여성과 일하는 것을 거부해 배치되지 못하고 다른 부서에서 일해야만 했다.
‘꿔다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 그에게 맡겨진 업무는 ‘문서수발’이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 동시에 스스로 일을 찾았다.
“인사과 선배가 일이 많아 보이면 제가 대신 인사기록카드를 작성했어요. 민원 부서 선배 대신 ‘건물 소방 관리자 교체 신고’같은 간단한 민원은 제가 접수했고요. 좋게 말하면 ‘리베로’ 였죠(웃음) .” 어느날 그를 거부했던 부서장이 그를 다시 받겠다고 했다. “제가 일하는 걸 보고 마음이 바뀌신 것 같았어요.”
진로도 스스로 개척했다. 당시 여성은 주요 업무를 맡지 못해 ‘심사 승진’이 어려워 그는 승진 시험을 준비했다. 이로 인해 다른 여성 선배들보다 진급이 빨랐고, ‘여성 최초’로 고위직에 진출하게 되는 밑바탕이 됐다. 그는 “남편이나 친정에서 가사와 육아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밤샘 업무나 승진시험 공부는 엄두도 못 냈을 것”이라며 “여자가 육아와 가사를 도맡는 게 당연시되던 시대에 다른 여자 선배들보다 운이 좋았다”고 밝혔다.
그는 이후에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난제를 해결하곤 했다. 119안전센터장 시절 도로변 주차 문제를 놓고 지역민들과 소방서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자 ‘도로 양쪽이 아닌 한쪽에만 주차하는 방안’을 내 해소했다. 119 구급대원을 도울 의료진 확보가 어려워지자 지역 내 의사들이 돌아가며 119에 근무하는 시스템도 고안해냈다. 그는 “‘상황이 얼마나 열악한가’보단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 길을 잘 터 준 것 같냐’는 질문에는 “후배들이 더 낫다”고 강조했다. “남성들만의 영역이었던 화재진압 분야조차 이제 여성들이 진출하고 있다”며 “그들은 체력에서도 남성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노력을 쏟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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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각오가 없다면, 또 거기서 얻는 보람을 가장 큰 보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길을 택할 수 없어요. 남자든 여자든 그들은 ‘소방관’이에요.”
그의 ‘포부’는 후배들이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취미 한번 가져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남편과 친정·시댁 식구들도 저를 위해 희생했고요. 후배들까지 그렇게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불이 나면 피하지 않고 오히려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게 소방관의 DNA’라는 말이 있는데 이제 그런 DNA만 강조하는 시대는 지났다”라며 “시민들의 재산·생명뿐 아니라 동료나 후배의 안전도 챙기는 소방서를 만들어가고 싶다”라고 밝혔다.
▼ 박용필 기자 phil@khan.kr
플랫팀 기자 fla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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