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중·러 맞선 ‘美 핵증강’ 韓엔 기회다[이미숙의 시론]
푸틴 평양行이 부른 안보 위기
北 이어 러시아 핵도 한국 겨눠
북·중·러 핵 증강 불안 느낀 美
비확산 고수 대신 핵 확대 선회
韓도 美제공 핵우산 안주 넘어
농축·재처리 핵 능력 가질 기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북·러 관계가 냉전 시대 동맹 수준으로 복원됨에 따라 북핵에 러시아의 핵무기까지 걱정해야 하는 전혀 새로운 안보 위기 상황을 맞게 됐다. ‘북·러 신(新)조약’이 유사시 즉각적인 협의와 개입을 명시하면서 푸틴의 손아귀에 있는 핵이 대한민국을 위협하게 됐기 때문이다. 북·러 밀착으로 한반도의 안보 시계(視界)는 극도로 불투명해졌지만, 이 같은 위기를 역으로 활용하면 한국의 핵 역량을 확보하고 키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바꿀 수 있다.
최근 들어 미국의 핵 정책엔 변화 흐름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자체 핵무기 현대화에 나서면서 핵 비확산에 대한 극단적인 집착에서도 탈피하려는 기류가 눈에 띈다. 미 에너지부 산하 국가핵안보국(NNSA)이 지난 5월 네바다주에서 임계 이하 핵실험을 실시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극소량의 플루토늄을 이용한 실험으로, 임계 상태에 이르기 전 폭발은 중지됐다. 핵 연쇄 반응이 일어나지 않은 만큼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 위배는 아닌 것으로 정리됐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제한적 핵실험을 한 것은 핵 억제에 초점이 맞춰진 기존 정책으론 우크라이나 전쟁 후 본격화한 북·중·러 핵 밀착에 대응할 수 없다는 판단에 기초한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침공 후 핵 사용을 거듭 위협하면서 미·러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 스타트) 중단을 선언했다. 핵 증강에 나서겠다는 의지다. 지난해 모스크바를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주석과는 고속증식로 개발 협력에 합의했다. 2030년까지 핵탄두를 1000개로 늘리려는 중국은 플루토늄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푸틴의 도움으로 핵탄두 양산이 가능해졌다.
중·러 핵 공조에 위협을 느낀 미 의회와 싱크탱크는 일찌감치 핵 증강론을 펴왔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도 핵탄두 현대화 작업과 함께 잠수함 발사 크루즈 미사일 개발을 진행했지만, 민주당의 군축론자 입김 때문인지 바이든 행정부 들어 중단됐다. 하지만 푸틴의 거듭된 위협에 바이든 행정부도 현실 인정 쪽으로 기울고 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CBS 인터뷰에서 “북·중·러의 핵 증강에 대한 억지력 보장을 동맹 및 파트너 국가와 협의하겠다”고 한 것은 이런 기류를 반영한다.
설리번 발언이 한국과 일본 등 동맹국의 핵 개발을 허용하겠다는 시사는 결코 아니지만, 바이든 행정부가 핵 증산 쪽으로 선회했다는 것은 함의가 상당하다. 동맹국인 한국이 파고들 여지가 열리기 때문이다. 11월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미국의 핵 확장 흐름은 더 가속화할 것이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향후 미국에선 30년간 1조5000억 달러의 핵 프로젝트 시장이 열릴 것”이라면서 핵탄두와 크루즈 미사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증산 및 신형 잠수함, 폭격기 제작이 붐을 이룰 것이라고 관측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북핵이 심각해지면 자체 핵을 보유할 수 있다”고 했지만, 워싱턴선언 이후엔 확장억제 전도사가 된 듯하다. 자체 핵 역량 확보 필요성에 대해 선을 그으면서 북한 비핵화 얘기만 한다. 최근에도 “핵을 포기하고 경제 보상을 받은 카자흐스탄이 북한 비핵화의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국면이 바뀌고 있다. 김정은조차 ‘한반도 비핵화는 사멸됐다’며 푸틴과 핵 공조에 나선 상황이다.
이런데도 윤 대통령이 워싱턴선언에 집착하며 핵우산 신뢰를 되뇌는 것은 스스로 발을 묶는 셈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안보에 무지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다. 확장억제에 주력했던 미국이 북·중·러 핵 위협에 현실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핵 증산에 나서는 만큼 우리도 적극 편승해야 한다. 우선, 북·러 밀착으로 상황이 급변한 만큼 워싱턴선언에 기반해 출범한 핵협의그룹(NCG)의 핵우산 협의에 한국의 자체 핵 역량 확보 문제를 추가해 논의해야 한다.
당장 선회가 어렵다면 양국 정부와 싱크탱크가 주도하는 1.5트랙 회의 테이블에 한국의 농축·재처리 등 모든 옵션을 올려 공론화한 뒤 입법화에 나서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윤 정부가 미 의회와 행정부·싱크탱크를 대상으로 전방위 외교를 펴면서 자체 핵 개발 기회를 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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