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로 '인생 꽃' 피우는 순천시청 퇴직 공무원 화제
[헤럴드경제=박대성 기자]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중략)
판소리 단가(短歌) '사철가' 한 대목을 우렁찬 목소리로 멋드러지게 읊을 줄 아는 공무원 출신 소리꾼이 있어 장안의 화제다.
화제의 주인공은 전라남도 순천시청에서 지난해 12월 31일자로 지방사무관(과장)으로 퇴직한 허범행(61) 씨로 퇴직을 앞둔 공로연수 기간부터 1년 가까이 판소리에 입문해 배우는데 여념이 없다.
37년 간의 공직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소리 세계에 입문한 허 씨는 "퇴직 이후 시간도 나고 해서 평소 관심이 많았던 판소리를 배워보면 어떨까 싶어 배우고 있는데 주변에서 '잘한다'라는 칭찬도 받고 대회 입상도 하고 해서 성취감을 느낀다"라면서 "나는 원래부터 뭐에 하나 꽂히면 푹 빠지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허 씨가 판소리 계에 입문해 불러 젖힌 '사철가'는 소리하는 사람이라면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단가로 춘하추동 풍경을 묘사하며 세월의 덧없음과 인생 무상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소리와 노래는 무엇이 다를까.
판소리를 배우면서 인문학에도 심취하게 됐다는 허 씨는 판소리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판소리는 마당을 깔아준다는 의미의 '판'과 '소리'의 합성어라고 정의했다. 노래가 인위적이라면 소리는 자연적이다.
보통 민요는 앞에 '밀양 아리랑', '진도 아리랑'처럼 지역명이 붙어 있지만, 판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전라도에서 '노래 한 곡 불러 봐라' 하지 않고 '소리 한 번 해 봐라'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의 소리를 내라는 것이죠. 새소리도 귀신 소리도 소리꾼의 입을 통해서 그대로 표현해 내죠.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공직 생활을 오롯이 순천에서 보냈지만 '소리의 고장, 보성' 출신답게 항상 고향에 살고 싶다는 향수를 느꼈다는 허 씨는 판소리만 배우지 않고 소리의 모든 장르를 소화하고 있다.
판소리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 창은 물론 고수(鼓手·북 치는 사람) 수강도 빠지지 않고 사사하고 있다.
판소리에서 소리하는 창자(소리꾼)와 고수는 '바늘과 실'의 관계라고도 비유한다. 창자의 흥을 돋우고 호흡을 가다듬는 데 있어 고법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허 씨는 판소리의 장점에 대해 ▲뱃심을 길러야 해 단전호흡에 도움이 된다는 점 ▲소리와 고수를 함께 하면 치매 예방에 탁월하다는 점 ▲소리를 내지르고 북을 두드려야 해서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는 점 ▲가사의 뜻을 알고 불러야 해 인문학적 소양이 길러진다는 점 등을 장점으로 꼽았다.
국악 공연을 관람하면서 어려운 점이 추임새인데 어떻게 추임새를 넣어야 하고 반응을 해 줘야 할지 난감할 때가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도 허 씨는 쉽게 설명했다.
그는 "관객들의 추임새가 있어야 소리꾼이 신명이 나는 법이고 호흡도 가다 듬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얼씨구~' '잘한다~' '좋다.' '암만.' 이런 식의 청중의 추임새는 소리꾼을 더욱 신나게 하므로 같이 관객도 즐겨야 하는 것이 판소리"라고 강조했다.
장성한 아들 4명을 뒀다는 허 씨는 자녀 양육을 위해 막내(22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는 일을 해야 한다는 아내(순천시 팀장)에 가장으로서 미안하다고 했다.
퇴직 이후 후배들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 시청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고 오로지 소리 연습에만 몰두했다는 허 씨는 입문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낙안읍성 전국국악경연대회를 시작으로 무안승달국악경연대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 등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하는 등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허 씨를 가르치고 있는 판소리 고법 보유자인 장보영 선생은 "허씨는 타고 난 목청도 좋고 통이 크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의 배우려는 의지가 다른 수강생에 비해 10배는 강해서 습득 능력이 굉장히 좋다"고 격려했다.
허씨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좋은 판소리인데 진즉 좀 배울걸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면서 "판소리를 익히면 대중가요도 잘 부르는 기법이 생긴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판소리는 악보가 없이 스승의 구전(口傳)에 의해서만 전해지기 때문에 공무원 할 때보다 온 산천을 도서관으로 삼는 시간이 더 많은 것 같다"라고 밝게 웃어 보였다.
parkd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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