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사·범죄피해, 성행위 묘사까지…'사생활 도용' 소설, 결국 판매 중단
"그는 소설에서 제 거주지와 스토킹 피해를 묘사해 특정 가능한 캐릭터를 만들고, 그를 성적으로 '능숙하고 자상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다른 소설에서는 제 실명과 같은 캐릭터를 만들어 남성 두 명과의 성행위를 묘사했으며, 제 가정사도 비유해 사용했습니다. 다음 소설엔 무슨 개인사를 가져다 쓸지 모르겠다는 공포감이 너무 큽니다.(유튜버 김현지)"
타인의 사생활을 동의 없이 소설에 사용하는 '사생활 도용' 논란에 휩싸인 소설가가 문제가 된 소설을 더이상 판매하지 않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콘텐츠 업계 전반에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할 수 있는 사안을 인용할 때에는 윤리적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 제기를 한 김현지 씨는 소설가 정지돈 씨의 전 연인으로, 김 씨는 정 씨가 자신의 가정사, 스토킹 피해 등 본인의 개인사를 무단으로 인용하고 성행위를 반복적으로 묘사했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이에 정 씨는 25일 자신의 블로그에 "제 부족함 때문에 김현지 씨의 고통을 미리 인지하지 못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며 출판사에 판매 중단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정 씨는 김 씨가 주장한 내용이 모두 사실인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몇몇 모티프만으로 개인의 삶이 도용됐으며, 소설 속 인물이 실제 인물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며 "사과나 인정이 두려운 게 아니라, 진실이 아닌 일이 진실이 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김 씨가 문제를 삼은 작품은 두 가지다. 김 씨는 정 씨가 지난 2019년 자신과 헤어진 직후 발간한 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등장인물 '에이치(H)'의 행적에 자신의 과거 거주지와 스토킹 피해, 정지돈과 가까워진 과정, 둘 사이에 나눈 대화 등을 인용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또한 올해 4월 발간한 소설 <브레이브 뉴 휴먼>의 경우 등장인물 '권정현지'가 자신과 이름이 같고, 권정현지가 엄마와 교류하는 과정이 김 씨의 가정사와 닮았다고 지적했다.
김 씨는 정 씨가 자신의 사생활을 인용한 것으로 보이는 등장인물들의 성행위를 묘사한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 정 씨는 자신의 소설에서 에이치의 성행위가 "능숙하고 자상했다"고 묘사했으며, <브레이브 뉴 휴먼>의 주인공이자 두 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은 여성 '아미'를 "현지를 닮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정 씨는 그러나 '권정현지'는 김 씨와 다른 인물이며, 스토킹 피해에 관한 내용은 "직접 겪은 일을 실제 인물을 특정할 수 없게 변형해서 서술"했다고 반박했다.
김 씨는 24일 <프레시안>과 한 서면 인터뷰에서 "정지돈은 나의 사생활과 범죄 피해, 가정사까지 모두 가져다 썼다"며 "다음 소설엔 무슨 개인사를 가져다 쓸 지 모르겠다는 공포감이 너무 크다"고 호소했다.
"인용 당사자 피해 없도록 주의하는 게 현대 시대의 창작 윤리"
동의 없는 사생활 인용으로 인한 명예훼손 논란은 문학계에서 몇 해 전부터 반복돼왔다. 지난 2020년 김봉곤 작가는 지인들과 나눈 사적인 대화 내용들을 동의 없이 인용했다는 논란에 휩싸였고, 해당 소설은 끝내 판매가 중단됐다. 이듬해에는 김세희 작가는 성소수자 친구의 사적 대화 및 에피소드들을 소설에 실어 주위 지인들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성정체성을 공개하게 만들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영화계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었다. 1991년 아동 유괴 사건을 다룬 영화 <그놈 목소리>는 피해 아동의 유족과 유괴범의 통화 녹음을 그대로 실었다가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았다. 2007년 부산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암수살인>은 피해자 측 동의 없이 인물의 나이, 범행 수법, 범행 지역 등을 원래 사건 그대로 묘사해 피해자 유족 측에게 거센 지탄을 받았다.
창작물 속 사생활 도용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는 재판을 통해 권리를 구제받을 수 있다. 범유경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는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특정성이 성립된다면, 인격권 침해 발생 시 출판(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나 손해배상청구 등의 대응을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다만, 법적 분쟁만으로는 이미 대중에 알려진 사생활을 되돌릴 수 없기에, 창작자가 사전에 당사자와 충분한 협의를 거치는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출판계 종사자 A씨는 "개인 간 내밀한 관계들 속에서 공유된 이야기를 소설에 인용한다면, 공적 사안을 인용할 때보다 당사자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 현대 시대의 창작 윤리"라고 설명했다.
성상민 문화평론가도 "개인의 사생활을 일부 각색해 차용하는 경우 법적 분쟁으로 모든 피해를 막을 수는 없다"면서도 "공개적인 문제 제기가 이뤄지는 상황 자체가 창작의 실패라고 볼 수 있다. 창작자는 당사자를 위한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상혁 기자(mijeong@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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