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연주’의 매력 & 관객 홀리는 마력 [마이 라이프]

김신성 2024. 6. 26.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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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코국제음악제’ 예술감독 김민지 교수
성황리 마친 ‘친환경 공연’
종이로 만든 홍보물은 대폭 축소
프로그램북·연주자 악보 디지털화
탄소배출량 줄여 기후위기에 대응
활만 켜면 자신감 ‘뿜뿜’
앙상블 협연자 진도 봐가며 체크
눈길 따라가면 곡의 흐름 느껴져
‘예울마루 대극장’ 최초 만석 기록
자존감 센 모범생 첼리스트
비싼 악기 가진 친구와 비교 싫어
시험때마다 아는 언니에 빌려 써
아무 악기나 적응 빨라져 ‘전화위복’
13년째 끊임없이 노력하는 스승
새로운 연주 시도하며 안주 안 해
‘가능성이란 이런 것’ 직접 보여줘
경쟁보다 도움 주는 관계 늘 강조

“내 느낌인데, 따단따딴따 이 대목에서 좀 더 느리게 가야 할 것 같아.”

객석 가운데서 지켜보다 무대 앞까지 맨발로 달려 나와 연주자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듣고 논의한 뒤 곧장 결정한다. “F부터 다시 한 번 해볼게요.”
김민지 교수는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후학들에게 가능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스승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최상수 기자
무대에 올라 해당 부분을 직접 연주해 보이거나 수정해야 할 사항을 전하기도 한다.

“의자 뒤 분홍색 표식지 붙여놨잖아요. 의자 끝을 거기에 맞추세요. (연주자들의 착석 모습인 반원 모양에서) 삐져나오지 마세요.”

물 맑은 도시 여수에서 지난 20∼23일 나흘간 펼쳐진 제9회 여수에코국제음악제의 리허설 모습이다. ‘모범생’ 첼리스트 김민지 교수(서울대)가 지난해에 이어 예술감독을 맡았다. 솔직하고 털털한 성격의 그는 또각또각 소리 나는 구두를 벗어놓고 맨발로 공연장을 누비며 하나하나 꼼꼼히 점검해 나갔다. 그의 이 같은 수고 덕에 공연이 열린 GS칼텍스 예울마루 대극장은 2012년 개관이래 처음으로 2층 객석까지 개방, 1021석을 모두 채우는 만석 기록을 세웠다.

“여수, 순천, 광양 지역의 탄소배출량이 전국 배출량의 17%나 차지한대요. 지난해부터 종이로 제작되던 홍보물을 대폭 줄이고 프로그램북과 연주자들의 악보마저도 디지털화했어요. 축제를 찾은 관객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재활용 종이팩을 가져오면 친환경기념품으로 바꿔주는 행사를 함께 진행했고요, 연주곡 역시 ‘숭어’ ‘종달새’ 등 자연과 관련된 작품들로 짰어요.”

전국에 음악제는 많지만 ‘에코’를 주제로 내건 것은 드물다. ‘여수국제음악제는 기후위기를 바라보며 지난해부터 ‘여수에코국제음악제’로 이름을 바꾸었다.

“악기도 나무에서 왔어요. 음악의 소리는 자연의 소립니다. 음악과 자연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이 찾는다는 공통점을 지녔으니 자연을 담은 음악으로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첼리스타 첼로앙상블이 선사한 무대는 압권이었다. 12대의 첼로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영화음악과 비틀스의 히트곡 등을 들려주었다. 정상급 프로들의 연주답게 객석 전체가 꼼짝 못 하도록 마법을 걸었다.

활을 켤 때 김민지의 어깨선은 우아하면서도 의젓하다. 거침이 없고 자신감이 묻어난다. 객석의 시선을 모을 줄 아는 여유가 보인다. 붙잡아 당기거나 느슨하게 풀어주면서 자신이 내는 소리에 깊은 감동을 실어 보낸다.

그의 ‘시선 연주’도 일품이다. 앙상블 협연자들의 진도를 봐가며 전체 상황을 부지런히 체크한다. 합을 맞추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이리저리 살펴보는데, 그의 눈길을 따라가다 보면 곡의 흐름과 연주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이 또한 보는 재미를 배가한다. 관객이 기꺼이 즐기면서 쉽게 따라오는 이유다. 그의 ‘매력’과 ‘마력’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여수에는 벌써 그의 두꺼운 팬층이 형성됐다. 여수오케스트라단이 출범하면 초대 예술감독을 맡아달라는 요구가 이를 입증한다.

김민지는 연주자라면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길을 걸어왔다. 전문 음악가가 없는 집안에서 돌연변이처럼 음악을 택했고 경제적 어려움도 따랐지만, 16살에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입학했다. 미국과 프랑스 유학을 거쳐 스페인에서는 유명 오케스트라 부수석으로 일했다. 귀국 후에는 계명대를 거쳐 서울대 음대 교수가 됐다.

뛰어난 음감을 지닌 그는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 하지만 취미로 첼로를 배우던 아버지 품에 거대하게 안기는 악기에 마음을 빼앗겨 초등 5년 무렵 이를 전공하기로 마음먹는다.

예원학교에 입학했다. 예민한 사춘기는 그를 모른 척 지나가지 않았다.
“악기를 사용하는 날엔 엄마가 태워다줬어요. 쌍문동에서 예원학교까지. 도착하면 엄마에게 빨리 가라고 말했죠. 엄마 차는 서민차 ‘프라이드’였으니깐. 친구들이 볼까 봐서. 다른 아이들은 고급 외제차에서 줄줄이 내리는데. 저는 악기도 값싼 중국제를 썼거든요. ‘네 악기는 얼마야?’라고 물어보는 애들도 많았죠. 드러내진 않았지만 자존심이 상했어요. 실기시험 전날엔 아는 언니에게서 악기를 빌려다 시험을 치렀고, 이번에는 누구, 다음에는 누구 식으로 …. 근데 그렇게 빌려다 썼던 게 약이 됐어요. 이 악기 저 악기를 빨리 다룰 줄 알게 됐거든요. 악기마다 코드를 짚는 지판의 간격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적응하는 데 요령과 시간이 필요해요.”

오히려 약이 됐다고 생각한다니. 긍정의 힘이다. 그때의 서민차 ‘프라이드’는 엄마에게나 자신에게나 이제는 당당한 ‘프라이드’가 되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 서울예고 1학년이 되어서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고, 한예종에 들어가 정명화·박상민 선생을 사사하며 음악에 집중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피아티고르스키 세미나 마스터클래스에서 만난 첼리스트 로런스 레서의 눈에 들어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음악원에서 석사와 전문연주자과정, 최고연주자과정까지 5년 전액장학금을 받고 공부했다.

그에게 로런스 레서는 또 하나의 아버지 같은 존재다. “좋은 첼리스트 이전에 좋은 사람이 돼라”는 가르침을 이어받아 지금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뉴잉글랜드음악원 안에는 1000석 규모의 조던홀이 있는데, 그곳에서 공연 안내원으로 일하며 좋은 작품을 많이 봤어요. 당시엔 24시간 내내 음악을 듣고 음악과 관련된 일만 했죠. 종종 그때가 그립습니다.”

“더 넓은 곳에서 배워보라”는 레서 선생의 권유에 따라 프랑스 툴루즈 음악원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유럽에서 가르쳐주신 류이스 클라레트 교수의 응원에 힘입어 스페인 레이나 소피아 오케스트라에 입단해 활동했다. 주빈 메타가 음악축제 대표를 맡기도 했던 곳인데, 그가 지휘한 ‘니벨룽의 반지’ 시리즈는 전용기를 타고 관람하러 올 만큼 큰 인기를 누렸다.
2009년 한국에 들어와 2012년 대학 강단에 섰으니 후학들을 지도한 지도 벌써 13년째다.

학생들에게 항상 이야기한다. “경쟁도 중요하지만 먼저 서로 도움 줄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요즘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클래스’를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를 갖고 실행안을 구상 중이다.

“솔로 연주도 잘해야 하지만, 혼자 하는 악기가 아니므로 합(合)을 위한 소통을 해야만 해요. 상호작용의 폭을 더 넓혀야 잘 되는 분야인데, 본인들의 기량만 닦으며 소폭에 머무는 모습이 아쉽습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전달할 줄 알아야 하고 또 그것을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바라는 스승상은 어떤 것일까.

“먼저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계속 배우려는 태도를 스스로 굳건히 지켜야 해요. 처음 보는 레퍼토리에 도전하고 새로운 방식의 연주를 시도하면서 안주하지 않아야죠. 가능성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어야 하고, 많은 나이에도 최선을 다하려는 자세를 유지해야만 해요. 그리고 선생이 필요 없도록 만드는 것, 스승이 없어도 될 만큼 독립한 음악가로 키워내는 일을 묵묵히 수행해야 합니다.”

김민지 교수는…
 
●1979년 서울 ●예원학교 ●서울예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입학(16세) ●미국 뉴잉글랜드음악원 석사, 전문연주자과정, 최고연주자과정 ●프랑스 툴루즈 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 ●스페인 레이나 소피아 오케스트라 부수석 ●서울대 음대 교수 ●덕수궁 석조전음악회 음악감독 ●여수에코국제음악제 예술감독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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