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의 반이민 정책, 무당파 표심 노리나
11월 대선을 겨우 5개월 앞둔 시점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내키지 않는 승부수를 빼들었다. 경제 문제와 함께 불법 이민자 문제가 올 대선의 최대 이슈로 급부상하자 이들을 규제하기 위한 행정명령을 발동한 것이다. 바이든은 전통적인 친민주당 세력으로 분류되는 히스패닉 유권자들을 의식해 불법 이민자에게 비교적 관대한 입장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불법 이민자에 대한 민심이 악화하자 부랴부랴 초강경 조치를 취했다.
바이든이 6월4일 발동한 행정명령은 멕시코와 마주한 남부 국경을 통해 밀입국하는 불법 이민자를 겨냥했다. 밀입국하다 체포된 이들이 하루 평균 2500명을 넘어서면 이들에게 망명 신청 기회를 주지 않고 출신국으로 되돌려 보낸다는 내용이다. 실제 바이든이 행정명령을 발동하기 전, 3주 연속 체포된 밀입국자가 하루 평균 3700명에 달했다. 행정명령은 발표 당일 효력이 바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단, 체포된 사람이 1500명 이하로 떨어지면 2주 후에 종전처럼 정상적인 망명 신청을 다시 접수하고, 부모를 동반하지 않은 어린이와 인신매매 피해자는 이번 조치에서 제외한다는 예외 조항을 두었다.
그럼에도 2021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 전임 트럼프의 반이민 규제정책을 모두 철폐하겠다고 다짐한 바이든으로선 파격적인 정책 선회다.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이번 행정명령은 공화당의 주된 표적인 불법 이민 문제와 관련해 바이든 행정부가 취한 가장 공격적 조치다. 이 문제가 현재 거의 모든 유권자층의 상당한 반발을 일으키고 있다는 정치적 현실을 바이든이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에 밀입국하려는 불법 이민자들의 주된 통로는 멕시코와 마주한 캘리포니아·애리조나·텍사스·플로리다 등 남부 4개 주 국경지대다. 남부 국경선이 무려 1954마일(3145㎞)에 달해 미국 정부가 모든 구간에 걸쳐 장벽을 설치하기도 어렵고, 국경수비대 단속 요원을 무한정 늘릴 수도 없어서 불법 이민자 유입을 막는 건 불가능하다.
통계에 따르면 남부 국경지대로 밀입국하려는 불법 이민자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3월부터 서서히 증가해 그해 말 173만명에 달했다. 2022년에는 276만명, 2023년에는 280만명으로 급증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멕시코와 가장 긴 국경을 접한 텍사스주의 그레그 애벗 지사는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9만명 넘는 불법 이주민을 버스에 태워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포함해 민주당 시장이 이끄는 여러 시로 강제로 보내기도 했다.
종전에는 불법 이민자 대다수가 멕시코·과테말라·온두라스·엘살바도르 등 중남미 출신이었지만 팬데믹 이후 아프리카·동유럽·아시아 등 전 세계에서 몰려들기 시작하며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2022년 남북 국경지대에서 체포된 중국인은 900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6000명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12월 한 달간 적발된 불법 이민자 수가 25만명에 달하자 바이든 행정부도 더는 두고 볼 수 없게 됐다.
약 3600만명에 달하는 미국 내 히스패닉 유권자들을 포함한 소수계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해 그간 불법 이민 문제에 관대하던 바이든도 압박감을 느끼게 되었다. 더구나 트럼프가 자신을 가리켜 국경 안보에 취약한 대통령으로 공격해 많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면서 바이든은 잔뜩 수세에 몰렸다.
트럼프는 유세 현장이나 남부 멕시코 국경지대를 직접 방문해 “바이든이 불법 이민자들을 받아들여 미국을 범죄와 질병이 난무하는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있다” “감옥에서, 정신병원에서 나온 불법 이민자들이 우리 국민의 피를 더럽히고 있다” 등 사실과 거리가 먼 주장을 펼쳤다. 트럼프의 이런 차별적 언행은 멕시코와 국경을 맞댄 경합 주인 애리조나주 유권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폭스뉴스〉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트럼프는 애리조나에서 5%포인트 차이로 바이든을 앞질렀다.
트럼프에게 빼앗긴 표심 회복 가능할까
갤럽의 최근 여론조사에 따르면 인플레이션 및 경제 문제 다음으로 불법 이민(27%) 문제가 올 대선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꼽혔다. 불법 이민 문제가 유권자들의 주요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24년 만에 처음이라는 게 갤럽 측의 설명이다. 그만큼 대다수 유권자들이 불법 이민을 경제 문제만큼이나 피부로 느끼는 심각한 사안으로 본다는 뜻이다.
AP통신의 지난 4월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54%가 바이든 정부에서 불법 이민 문제가 더 악화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의 최근 조사 결과는 더욱 심각하다. 응답자 10명 중 8명이 바이든 행정부의 불법 이민 대응에 불만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들 가운데 45%는 현재의 불법 이민 상황을 ‘위기’, 32%는 ‘중대한 문제’로 보는 등 유권자들의 문제의식은 상당했다.
바이든의 조치가 나오자마자 민주당 내에서 대표적 좌파로 꼽히는 프라밀라 자야팔 하원 의원은 “극히 실망스럽고 잘못된 방향으로 간 위험한 조치”라고 비판했고, 앨릭스 파딜라 상원의원은 “합법적 망명 신청조차 가로막아 미국적 가치를 약화시켰다”라고 지적했다.
대표적 진보 단체인 미국민권자유연맹(ACLU)은 이번 행정명령이 ‘미국 영토에 들어온 사람은 입국 방식에 상관없이 망명 신청권이 있다’는 이민법 취지에 위배된다며 소송에 나설 참이다. 공화당도 야단이다. 존 코닌 공화당 상원의원은 “다가올 대선과 낮은 지지율을 감안한 정치적 꼼수에 불과하다”라고 바이든의 행정명령을 비난했다. 특히 트럼프는 “사기꾼 바이든이 마침내 뭔가 국경 안보 조치를 취하는 시늉을 보였지만 이는 쇼에 불과하다”라고 맹공을 퍼부었다.
일각에서는 바이든이 내린 행정명령이, 공화·민주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지만 가장 큰 유권자 집단을 이루고 있는 중도 성향의 무당파 유권자들을 겨냥한 조치라는 분석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바이든의 이번 조치가 무당파 유권자들에게 손을 뻗쳐 이들의 지지를 끌어올리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라고 지적했다. 즉 바이든이 행정조치를 통해 무당파 유권자들에게 불법 이민 문제를 둘러싼 자신의 유약한 이미지를 씻어내 트럼프에게 빼앗긴 표심을 회복하겠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미국 유권자 수는 약 1억6000만명으로 추산된다. 갤럽이 지난 4월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스스로를 공화당이나 민주당 당원이라고 밝힌 유권자는 각각 27%에 불과했지만, 무당파라고 답한 사람은 43%에 달했다. 2020년 대선 때 투표장에 모습을 드러낸 무당파 유권자가 전체 투표자의 26%를 차지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올 대선에서도 이들의 표심은 두 후보의 당락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란 관측이다.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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