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겸손과 침묵
오랜만에 걸려 온 후배의 안부 전화에 예술의 섬인 나오시마에 배낭여행을 다녀온 것, 경상도 관찰사 선정비(善政碑) 관련 글을 썼다는 등 근황을 전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집사람이 “당신, 자랑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요?”라고 한다. “만나면 돈 자랑에 자식 자랑뿐인 친구 때문에 때로는 괜히 약이 오른다”는 지하철 옆자리 아주머니들의 뒷담화가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했다. 빈 수레가 요란하고 조용한 가운데 권위가 있다 하였으니! 남의 심사를 묘하게 건드리는 자랑이나 잘난 척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건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세상은 열차처럼 떠들어대는 자들의 몫인 것 같지만 /… / 침목은 지축을 울리며 달리는 열차의 굉음을/ 제 몸으로 받아내어… / 이윽고 침묵을 남긴다 / 지반이 꺼지지 않도록 / 철길을 받치고 종착역까지 옮겨주는 것은 / 저 말 없는 것의 힘이려니….’ 복효근 시인의 ‘침묵의 힘’이다. 모두가 자기 자랑에 떠들썩한 세상에서 겸손과 침묵을 생각해 볼 일이다.
자랑은 자신과 관련된,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에게 알리는 행위다. 자랑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경우 상대방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본인의 자존감도 높일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주관적 만족감을 객관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상대방의 마음을 건드리는 ‘자랑질’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만 골라 올리면서 자랑질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짜증이 난다’는 요즘 세태인 SNS 피로증후군이다. 이에 대한 네티즌의 통찰을 마음에 새긴다. ‘그들은 대부분 실존하는 모습이 아닌 삶의 하이라이트를 멋지게 포장하고 편집하여 마치 즐거운 일만 있는 것처럼 자랑한다. 모든 삶은 빛날 수 있지만, 그 빛을 만드는 건 오로지 본인의 몫이다. 그것은 잘난 척하지 않고, 상대방의 말을 부정하지 않으며, 자신의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가운데서 자신은 물론 타인과 훌륭한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이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가 채 열 명이 안 되어도 실망하지 않는, 자식 자랑은 하지 않되 스스로가 자식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미안해서 자랑을 못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겸손은 상대방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침묵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뿜어낸다.
하여,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했다.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과 같이 한다’는 뜻으로, 노자 제56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자기의 지혜와 덕을 함부로 자랑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세상과 어울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자랑할 때 사람들은 도망가게 되어있다. 사람은 정서적 소모가 적고 편안한 사람을 찾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의 자랑은 듣기 싫고 나는 하고 싶고, 그러고 보면 자랑은 내로남불성 대화다.
얼마 전 모임에서 한 친구가 오늘 새벽에 베트남 3박5일 여행에서 돌아왔다고 하니 다른 친구는 이틀 뒤 몽골로 골프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 한다. 몇몇 친구 또한 질세라 베트남과 몽골에 대하여 몇 마디씩 건넨다. 나도 입에서 몽골 트레킹 갔다가 어저께 돌아왔다는 말이 튀어나오려 했다. 인내를 연기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버티었다. 자신이 기특해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랄까. 그것은 오래전 TV에서 본 장면 덕택이다. B는 남들에게 잘 보이지도 않는 식탁 밑바닥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A가 “거기는 안 보이는데”라고 한다. B의 대답은 “내가 알잖아” 그리고 “남이 생각하는 나보다 내가 생각하는 나가 더 중요해!”라는 것이었다. 자신의 가치를 높여가는 사람은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를 소모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
필자를 포함해서 물어보지도, 궁금하지도 않은 이런저런 자랑으로 애써 인정받으려는 사람들, 순간의 부러움을 사고 우월감을 얻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하지만 이 글 가운데도 과시욕이나 자랑질의 충동이 담겨 있을 텐데 걱정이다. 남을 이기면 일등이 되고, 나를 이기면 일류가 된다고 했던가! 에라, 필자의 칼럼이 나오는 날은 몇몇 친구들에게 링크를 걸곤 했는데 우선 그것만이라도 그만두어야겠다.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