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어둠이 내리면 비로소 빛나는 곳
‘메타 시티: 서울-파리’展서 신작 공개
“서울의 정체성은 네온사인 아닐까. 어둠이 내리면 각종 간판이 반짝거리고, 낮보다 밤이 더 활기찬 매력적인 도시.”
디지털 아트의 선구자로 꼽히는 프랑스 작가 미구엘 슈발리에(Miguel Chevalier·65)는 서울을 이렇게 정의했다. 1988년 처음 방문한 이후 15번이나 서울을 오갔다는 그에겐 흥미로운 풍경이었다. “유럽에선 볼 수 없는 활력이 있었다. 빠른 속도로 팽창하면서도 옛 건물과 현대 건축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도시로 각인됐다.”
그가 서울을 소재로 만든 미디어 아트 신작 ‘메타 시티 AI 서울 2024′가 처음 공개됐다. 파리 올림픽을 기념해 서울 중구 KF XR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메타 시티: 서울-파리’에서다. 슈발리에를 비롯해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미디어 아티스트 권하윤 등 양국 대표 작가들의 실감형·미디어 아트 작품을 선보인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올림픽의 인류 보편적 가치를 기리고, 양국의 올림픽 개최 도시를 중심으로 상호 교감하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기획했다”고 밝혔다.
가장 눈길 끄는 작품이 슈발리에의 신작. 화면 앞에 서면, 마치 디지털 게임 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가상 도시가 펼쳐진다. 초고층 빌딩 숲을 유영하듯 무한히 이어지는 화면 속에서 익숙한 간판이 지나간다. 생활맥주, 명륜진사갈비, 치맥맛집…. 초록색 픽셀로 형성된 숭례문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저 멀리에 ‘을지로 3가’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보인다.
최근 화상으로 만난 작가는 “시작과 끝 지점 없이 무한히 확장하는 화면 속에서 높은 건물이 이어지고, 관객들은 터치 스크린을 직접 작동하면서 도시를 능동적으로 탐험할 수 있다”고 했다. “그간 한국을 오가며 카메라에 담아온 서울 풍경을 AI를 활용해 끊임없이 연결된 가상 도시로 생성했다. 디지털로 생성된 빌딩들과 서울의 독특한 랜드마크, 숭례문 같은 상징적인 건물의 데이터베이스를 혼합해 만든 작품이다.”
슈발리에는 2000년대 초반부터 급작스러운 변화를 겪으며 확장하는 도시에 주목해 왔다. 파리, 교토와 도쿄, 베이루트, 몬터레이 등 도시의 DNA를 탐구해 최첨단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메타 시티’ 연작으로 발표했다. “도시 확장이 주변 지역을 흡수하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기록해 관객들에게 도시가 성장하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를 탐구하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디지털 아트’라는 장르조차 없었던 1980년대 초반부터 컴퓨터로 작품을 만들었다. “당시엔 연구소나 방송국에 가야 컴퓨터를 볼 수 있었다. 엔지니어들을 설득해서 퇴근 후 밤 12시부터 새벽 6시까지 조금씩 배워나갔다. 1980년대 후반이 돼서야 사람들이 집에서도 컴퓨터를 쓸 수 있는 ‘컴퓨터의 민주화’가 일어났다.”
가장 존경하는 아티스트로 백남준을 꼽았다. 그는 “미술사를 보면 새로운 도구를 사용해 장르를 개척한 선구자들이 있다. 사진이 처음 등장했을 때 회화 쪽에서는 사진을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고, 비디오가 등장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며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인 백남준이 있었기에 오늘날 미디어 아트, 실감형 아트라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라고 했다. “내가 처음 컴퓨터를 다루던 때도 마찬가지였다. 컴퓨터는 기술이지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언제나 시대에 맞게 도구를 바꿔왔다.”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지난 2021년 제주도에서, 지난해 서울 아라아트센터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다. 지난 연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서울라이트 DDP 2023 겨울’에서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건물 외벽을 온통 뒤덮은 초대형 미디어 파사드 쇼도 그의 작품이었다. 40년 넘게 컴퓨터가 발전해 온 역사와 더불어 경력을 쌓아온 그에게 프랑스 문화부는 2022년 예술 훈장을 수여했다.
그가 가장 존경한다는 백남준의 작품도 한 공간에 전시됐다. 근대 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을 주제로 만든 비디오 아트 작품이다. 권하윤이 프랑스인 스승의 추억을 작가의 관점으로 재구성한 VR 작품도 흥미롭다. 9월 7일까지. 무료.
☞미구엘 슈발리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미디어 아티스트. 1980년대 디지털 아트라는 장르의 문을 열었다. 40년 넘게 예술적 표현 수단을 오직 컴퓨터에 집중해왔다. 대형 LED/LCD 화면에 사람의 몸짓에 반응하는 디지털 아트를 구현한다. 2021년 제주도에서 열린 개인전 ‘디지털 심연’은 누적 관객 32만명을 기록했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