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푸틴 취임식 참석하고 뒤통수 맞는 외교
최악에 대비하는 게 안보인데 러시아 기만 전술에 넘어갔나
정부가 지난달 초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다섯 번째 취임식에 현지 대사를 참석시킨다고 했을 때부터 예감이 좋지 않았다.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 정적을 제거한 독재자가 영구 집권을 자축하는 자리였다. 푸틴은 국제형사재판소가 체포 영장을 발부한 전범(戰犯)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의 보이콧 요청에 자유 진영 전체가 괜히 응한 게 아니다. 한국의 돌출 행동을 두고 외교가에선 뒷말이 무성했다.
한 달 뒤 푸틴은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 점을 거론하며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얼마 전까지 한·러 관계 파탄을 경고하던 어조가 많이 누그러졌다. 말뿐이긴 했지만 한국의 선의에 호응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푸틴이 올리브 가지를 내밀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푸틴 방북설은 이런 분위기 속에 본격 확산됐다.
외교가와 학계에선 ‘북·러가 소련 시절 군사 동맹을 복원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유사시 자동 개입 조항이 부활한다는 얘기였다. 이 조항은 1961년 북한과 소련이 맺은 동맹 조약의 핵심이다. 1990년 한·소 수교로 사문화됐고 1996년 조약 자체가 폐기됐다. 이것이 되살아난다는 것은 한·러 관계가 수교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한국 대러 외교의 실패를 의미했다.
대통령실은 의아할 정도로 낙관적이었다. 군사 동맹 부활까진 아니라고 보는 분위기가 강했다. 러시아 측 언질을 받은 듯했다. 안보실장은 TV에 나와 “러시아 측에 선을 넘지 말라고 경고한 바 있다”고 했다. 러시아와 소통 중이며 결국 우리 뜻이 관철될 것이란 메시지로 해석되기에 충분했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푸틴은 회담 직후 회견에서 “침략당할 경우 상호 지원하는 조항이 포함됐다”고 했다. 김정은은 “군사 동맹”을 거듭 얘기했다. 두 사람 말을 합치면 유사시 자동 개입 조항이 부활했다는 얘기였다. 무슨 까닭인지 대통령실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 고위 관계자는 주요 언론사들에 전화를 돌려 “자동 군사 개입으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의 다음 행동을 미리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하진 못했을 것이다.
회담 이튿날 북한은 조약 전문을 전격 공개했다. 제4조가 ‘어느 한쪽이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할 경우 다른 한쪽은 지체 없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한다’였다. 명백한 자동 군사 개입 조항이었다.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사실상 인정하는 조항도 있었다. 우리 뒤통수를 친 정도가 아니라 등에 칼을 꽂았다는 평가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제야 안보실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살상 무기 지원을 검토하겠다며 부산을 떨었다. ‘오판’으로 시작해 ‘현실 부정’을 거쳐 ‘뒷북 대응’으로 막을 내린 한 편의 촌극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사전에 조약 내용을 파악해 보고했지만 상부의 판단은 바뀌지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실이 러시아의 립서비스를 맹신했다는 취지였다. 전직 고위 관리는 “러시아의 기만전술에 당한 것 같다”고 했다.
예전의 러시아가 아니다. KGB 요원 출신인 푸틴은 ‘소련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법 위반, 거짓말, 속임수, 사실 은폐 따위를 예사로 해치워야 한다”는 레닌의 교시를 따른다. 이런 집단을 상대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게 희망적 사고다. 푸틴 취임식에 참석하면 러시아가 알아줄 거란 기대, “한국에 감사하다”는 푸틴 발언에 반색하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존재할 리 없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를 철석같이 믿고, 가망 없는 부산 엑스포 유치에 외교 자원을 쏟아부은 결과가 어땠나. 안보는 최악에 대비하는 것이다. 희망 회로 돌리는 것은 외교가 아니라 기복 신앙이다. 푸틴의 방북이 한국 안보팀의 실력을 백일하에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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