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대학, 예전처럼 가르쳐선 미래가 없다는 절박함에서 시작”[논설위원의 단도직입]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2019~2020년 입학본부장을 지냈고, 2023년 2월부터는 교육부총장을 맡고 있다. 유홍림 총장의 공약사업으로 융합·교양교육 강화를 위해 신설되는 학부대학 설립추진단장이기도 하다. 대학 신입생들에게 문학·철학 등 인문학의 중요성을 알리고, 컴퓨터·공학 등 다른 영역과 결합한 인문학의 다양한 모습을 소개한 <스무살, 인문학을 만나다>(2010)의 공저자이다.
서울대 졸업생 도전 정신·공감 능력 부족하단 지적 많아…누굴 뽑느냐보다 어떻게 가르칠까 고민
‘베리타스’ 자립·혁신·실천 3단계로…3명의 다른 전공 교수들 함께 계획 짜고 토론하고 수업
하나의 문제 해결 위해 여러 학문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게 핵심…성공 열쇠는 ‘교수진 간의 팀워크’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자기 분야에만 함몰돼선 결코 새로운 도전 나오기 어려워
학문의 발전만큼 중요한 건, 지금 여기 대학에 있는 아이들이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이죠
“늘 우리는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아이패드 같은 창조적인 제품들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가지 요소들의 결합 덕분이었다.”
스티브 잡스의 이 유명한 말까지 굳이 끌어오지 않더라도, ‘통섭’과 ‘융합’은 일종의 시대적 키워드가 됐다. 실제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계를 넘어야 한다. 그것은 꼭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만이 아니다. 계급, 장애, 젠더, 인종, 국적 등 우리 사회를 분절시키는 모든 형태의 경계와 장벽을 직시할 수 있어야 이 복잡한 세상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지금의 대학교육은 그 길을 알려주는 등대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입시를 위해 가장 먼저 경쟁부터 배워야 했던 아이들은 대학에 가서도 취업 경쟁에 매진하기 위해 자신의 영역 안에만 머무르기 쉽다. 의대 증원 사태에서 봤듯이 때로는 그 안에 갇혀 기존의 경계를 더욱 확고히 하는 데 일찌감치 이바지하기도 한다.
서울대가 기초교양교육을 담당해온 기존의 기초교육원을 확대해 ‘학부대학’을 신설키로 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학과의 장벽을 뛰어넘어 마음껏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줌으로써 다양한 분야를 연결하고, 경계를 넘어 본질을 보도록 돕는 것이 학부대학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이를 위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2025학년도부터 신설되는 공통교육과정 ‘베리타스’이다.
‘베리타스’ 수업은 3단계 과정으로 이뤄져 있다. 신입생 대상인 ‘베리타스 자립’은 생명·평등·자유 같은 보편적 개념에 대해 토론하는 필수교양과목이고, 2단계인 ‘베리타스 혁신’은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기후변화·성차별·공정과 정의 등 사회적 문제에 관해 서로 설득하고 조율하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다. 마지막으로 쪽방촌 주택 개선이나 윤리적 인공지능(AI) 활용 방안 등 주변 세계와의 직접적 상호작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보는 프로젝트 수업인 ‘베리타스 실천’이 있다. 모든 베리타스 강좌는 여러 전공 교수들이 협업해 수업을 공동으로 운영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김성규 서울대 교육부총장은 지난 18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제는 ‘누굴 뽑느냐’보다 ‘어떻게 교육하느냐’가 더 중요해진 시대”라면서 “AI의 등장 등 미래 사회가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예전처럼 가르치면 더 이상 대학교육에 미래가 없다는 절박함 때문에 학부대학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김 부총장은 “학부대학 설립추진단이 준비 과정에서 많은 분들께 의견을 구하러 다녔는데, 대부분 서울대 졸업생 이미지가 부정적이었다고 한다”면서 “특히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 정신과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가장 많았다”고 전했다. 그는 “학부대학은 우리 사회, 나아가 전 지구적인 문제에 대해 창의적인 해결 방법을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 학부대학이 가장 공들여 준비하고 있는 ‘베리타스 과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여러 학과 교수들이 협업하는 강의라는 게 인상적인데, 기존에는 이런 형태의 수업이 없었나요.
“그동안에도 여러 전공의 협업 수업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보통 15주 과정이라고 하면 3명의 교수가 각각 5주씩 나눠서 하는 식이었어요. 같이한다기보다는 그냥 기간만 나눠서 각자 따로 수업하는 것에 가까웠죠. 반면 베리타스 수업은 3명의 서로 다른 전공 교수들이 아예 처음부터 강의 계획을 함께 짜고, 매번 함께 수업에 들어가 같이 토론하며 수업을 진행합니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학문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하는 점이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학기에 베리타스 시범 수업으로 개설된 ‘데이터로 디자인하는 리더십’은 고길곤 행정학과 교수, 이장섭 디자인학부 교수, 이찬 첨단융합학부 교수 3명이 함께 진행했다. 수업 주제는 캠퍼스 환경 개선이었다. 행정학과 교수가 문제 해결에 필요한 데이터를 찾아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가르쳤고, 디자인과 교수는 소셜 디자인과 디자인 싱킹을 접목시켰다. 그리고 산업인력개발학과 교수는 이렇게 찾아낸 해결 방법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설득하고 추진하는 방법, 즉 리더십을 맡았다.
이찬 교수는 “이런 형태의 수업이 성공하기 위한 핵심 열쇠는 교수진 간의 팀워크”라면서 “수업이 있는 날이면 오전마다 교수 3명과 조교 6명이 모여서 그날 수업 내용을 미리 논의하고 점심까지 함께 먹은 후 수업에 들어가곤 했다”면서 “교수 3명이 수업 하나를 같이 담당하면 수고가 3분의 1로 줄어드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3배는 더 힘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캠퍼스 내 쓰레기통이 부족한 곳이 어딘지, 장애인이 이동할 때 학내 무엇이 불편한지, 버스정류장 하차 지점 위치가 최적화돼 있는지 등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분석한 후 소셜 디자인에 입각해 보다 효과적인 대안을 내놓고 설득했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 연구 발표회에서 등산객이 많이 오는 주말에는 쓰레기통 위치를 어떻게 바꿔야 한다는 것까지 제안하더라”면서 “이는 데이터만, 디자인만, 리더십만 따로 배워서는 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번 수업을 준비하면서 나부터도 데이터와 디자인 등 다른 전공 분야에 대해 정말 많은 공부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다만 학내에서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베리타스 자립’은 신입생 3500여명 모두가 들어야 하는 필수교양이다보니, 토론형 수업임에도 강의별 정원이 120명에 달한다. 투입돼야 할 조교의 수도 많고, 각 조교의 역량도 중요하다. 교수들이 서로 다른 학문의 유기적인 연결을 위해 수업에 얼마큼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이 교수는 “이번 시도는 윷놀이로 치면 개·걸·윷이 없는, 모 아니면 도”라면서 “‘모’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도’가 나올 수 있지만, 그 시행착오를 감수하고서라도 대학교육이 반드시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했다.
- 그런데 서울대는 원래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지 않았나요. 미국에서도 인문·사회·자연과학 등 교양에 역점을 둔 소규모 학부 중심의 리버럴 아츠 칼리지와 연구중심대학은 서로 다른데요.
“연구중심대학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연구 후속세대를 키우는 것인데, 좋은 학부교육 없이 좋은 후속세대는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학부교육도 바뀌어야 하는 거죠. 게다가 학생들이 졸업 후 모두 연구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소양은 전공지식 외에도 많으니까요. 대학은 연구소가 아닙니다. 학생이 있고 교육이 있기 때문에 대학인 것인데, 정작 교육에 상대적으로 덜 신경 써온 것이 사실이에요. 이제까지는 교수 업적 평가도 연구 중심으로 돼 있었는데, 앞으로는 교육 부분을 좀 더 반영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연구중심대학들 역시 마찬가지다. 프린스턴대 예술문화정책연구센터 관장이자 미국학회평의회 명예의장인 스탠리 카츠 박사는 이미 2005년에 “교양교육의 실패로 연구중심대학의 학부교육이 폐허가 될까 두렵다”면서 “학부생들이 어떤 종류의 교양교육을 받느냐에 민주주의의 활력이 달려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교양교육 재구상을 교육 의제의 최우선에 둬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대학에 실용주의 강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만 커져가고 있는 한국 사회가 고민해볼 지점이다.
- 학부대학이 여러 학과의 협업 수업을 시도하는 것은 요새 강조되는 ‘융합적인 사고’를 위한 것일 텐데, 그렇다면 ‘융합적 사고’란 건 뭘까요.
“자기 분야에 대한 깊이는 여전히 필요해요. 다만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기 분야에만 함몰돼선 결코 새로운 도전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전공 학문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동시에 이를 다시 횡으로 섞어서 다른 분야, 다른 사람 입장에 서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자는 겁니다. 그래야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자기 전공에도 더 의미가 생기는 거고요. 예를 들어 AI와 국문학은 언뜻 연관성이 낮아 보이지만, 지금 서울대 AI연구원 부원장 중 한 분은 국문과 교수예요. 중세국어 자료만 해도 다 데이터베이스화돼 있고, 말뭉치 분석과 자동번역 때문에 AI를 자주 활용하거든요. 이제까지의 교육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을 가르친 거였지만, 사실 저만 해도 이미 상상력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가능성을 열어주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하는 걸 만들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 여러 분야를 흡수한 후 자신 안에서 융합시켜 새로운 걸 찾아내는 건 사실 개개인의 머릿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인데, ‘베리타스’ 교양 수업을 한두 개 더 듣는 것만으로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을까요.
“물론 당장 큰 변화가 생기는 건 아닐 거예요. 하지만 드라이브를 걸었다는 데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 학부대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교수님들과 함께 서울대 교육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이렇게 끊임없이 논의한 경험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일단 이렇게 시작을 하면 10년, 20년 후에는 점점 우리가 기대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가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신입생 분반도 학과를 섞어서 나누려 하고 있습니다. 졸업할 때까지 그 분반을 통해 다른 학과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다양한 활동 기회를 제공하려고 합니다. 학부대학 내에 1학점 정도의 분반별 세미나 수업을 만드는 방안도 고민 중이고요.”
- 이번에 학제 개편을 하면서 교육부의 무전공 선발 확대 방침에 따른 ‘광역’ 모집정원 36명과 기존의 자유전공학부가 다 학부대학 산하에 편입됐죠. ‘융합’이란 명목하에 정부가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무전공 입학이 취업에 유리한 실용학문을 선택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돼 기초학문을 고사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나옵니다. 실제 덕성여대에서는 불문·독문과가 폐지되는 대신 무전공 선발이 확대됐습니다.
“무전공 입학은 입시 경쟁에 매몰돼 자신의 적성을 탐색해볼 기회를 갖지 못한 학생들에게 전공 선택권을 확대해준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어요. 서울대 자유전공학부의 경우 (경제·경영 전공을 많이 선택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음·미대를 지원하는 학생들도 있는 등 아직까지 실패하지 않고 잘 유지돼왔고요. 그렇지만 중요한 건 다양성입니다. (각자 교육철학에 따른) 여러 형태의 대학들이 섞여 있어야 합니다. 교육이라는 게 한쪽으로 가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요. 특히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서울대는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각 학문 분야를 보호·발전시키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육부 지침에 따라 무전공 선발을 (최소한도로) 늘리긴 했지만, 이미 서울대는 (베리타스 과정 도입 등) 내부적으로 교육의 질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어요. 무전공을 과도하게 확대할 계획은 없습니다.”
대학교육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던 김 부총장이 인터뷰 말미에 강조한 단어는 의외로 ‘행복’이었다. 그는 “학문의 발전만큼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있는 구성원들이 대학에 다닐 때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행복하지 않아요. 대학만을 목표로 달려온 아이들에게 대학은 그야말로 행복할 수 있어야 하는 공간인데, 학내 정신건강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예약이 굉장히 밀려 있어요. ‘미래에 행복하려면 지금 여기서 행복해야 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네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이 학부대학 취지이기도 합니다. 현재 행복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미래에도 행복을 느낄 수가 없어요.”
정유진 논설위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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