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시절 옷장 속 소녀 [1인칭 책읽기: 서울국제도서전에 부쳐] 

이민우 기자 2024. 6. 2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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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랩장의 1인칭 책읽기
오정희 작가 「중국인 거리」
옷장 속에서 침묵하기엔
너무 자라버린 사람들
옷장 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사진=연합뉴스]

유년시절 방학이 되면 할머니 댁에서 지내곤 했다. 할머니 안방에는 자개장롱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 들어가 있는 것을 좋아했다. 어둠 속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있으면 지워졌던 세상에서 명확해지는 것이 있었다.

손 끝을 타고 올라오는 이불의 촉감이며 나프탈렌의 냄새에 마음이 안정되곤 했다. 밥 먹으라고 부르기 전까지 나는 자개장롱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집에 낯선 사람들이 올 때마다 장롱에 들어가곤 했다.

나도 나이를 먹고 할머니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자개장롱은 어느 순간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자개장롱은 내 기억에서 사라졌다. 할머니에게 장롱이 어디 갔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나는 처음 보는 할머니의 친구분들을 뵐 때면 할머니가 방학 때마다 너무 잘 먹여서 커다래졌다며 농을 할 정도로 자라버렸다.

장롱을 다시 만난 것은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를 통해서였다. 소설은 한국전쟁 직후 인천의 어느 차이나타운의 모습을 그린다. 소설 속 화자인 한 '소녀'가 아버지의 일 때문에 전쟁 직후의 차이나타운에 이사를 하고 그곳에서 겪는 일을 그려내고 있다. 초등학교 2학년에서 5학년까지의 삶이 녹아 있는 이 소설은 화자를 둘러싸고 어머니의 출산, 양공주 매기 언니의 죽음, 할머니의 죽음, 그리고 길고양이들의 죽음을 뒤섞어 놓는다.

소설의 끝, 소녀는 어머니의 출산을 앞두고 숨바꼭질을 할 때처럼 몰래 벽장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소녀는 "나를 차라리 죽여 줘"라고 부르짖는 어머니의 산통을 들으며 죽음과도 같은 낮잠에 빠져들어 간다.

소설을 모두 후루룩 읽어 나가다 벽장 속으로 숨어든 소녀를 보며 잊혔던 자개장롱이 떠올랐다. 오정희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 있다는 이 소설은 시대도 경험도 성별도 모두 나와 달랐기에 타인의 이야기처럼 읽혔지만 훅 내 이야기가 돼버렸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절망감과 막막함으로 어머니를 불렀다는 화자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왜 할머니의 자개장롱 속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났다. 맞벌이를 하느라 방학이면 할머니 집에서 지내야 했던 유년시절의 나의 불안이 그곳에 있었다. 오정희 작가를 좋아하게 됐다.

옷 속에 손을 넣어 거미줄처럼 온몸을 끈끈하게 쥐고 있는 후덥덥한 열기를, 그 열기의 정체를 찾아내었다.
초조(初潮)였다.
오정희 「중국인 거리」 마지막 문단

2023년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로 오정희 작가가 임명됐다. 문화예술계는 빠르게 이 문제를 규탄했다. 오정희 작가는 박근혜 정부 시절에 행해진 블랙리스트 사태 실행자 중 한명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아시아 제공]

오정희 작가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있으면서 예술인들을 사찰, 검열, 배제했다는 눈초리를 받고 있다. 결국 항의를 하기 위해 서울국제도서전에 방문했던 작가들은 폭력적으로 제압당하며 서울국제도서전은 작가들을 쫓아낸 행사라는 오명을 얻었다.

가장 큰 문제는 문화예술계에서 어떤 문제가 터져나올 때마다 정확한 입장 표명 없이 일이 일단락된다는 것이다. 오정희 작가는 논란 끝에 서울국제도서전 홍보대사에서 스스로 사퇴를 결정했다. 그 이전인 2018년 한국문학관추진위원회에서도 블랙리스트 방조 논란이 있자 자진사퇴 의사 표명으로 마무리했다. 사건은 끝났지만 그 어디에서도 작가의 목소리는 없었다.

누군가는 오정희 작가가 블랙리스트에 적극적 가담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또 누구는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방조한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모두 오정희 작가가 스스로 말한 적이 없기에 생기는 문제다.

벽장 안에 들어간 소년과 소녀는 이제 없다. 미숙했던 시절 잠시 현실을 유예하고자 했던 나는 이제 충분히 현실을 받아들일 나이가 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장롱을 열고 나올 용기다. 서울국제도서전이 곧 열린다. 1년 전 상처가 아물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대화와 용기일 것이다.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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