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강수업에서 만난 사람들 [하종강 칼럼]

한겨레 2024. 6. 25.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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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청년이 종강수업에서 강의하는 모습. 필자 제공

하종강 |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이름이 ‘종강’인데 직업이 교수이다 보니 학기마다 이맘때쯤이면 온갖 일들이 생긴다. 학교 앞 횡단보도를 건너다 마주친 동료 교수가 활짝 웃는 얼굴로 “종강했습니다!”라고 외치며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교정에서 만난 학생이 넙죽 인사를 하면서 “종강 기념 ‘셀카’ 좀 찍을 수 있을까요?”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내 얼굴 사진 옆에 ‘종강 파티’라고 적힌 포스터를 보고 있던 총장이 내가 그 옆을 지나가자 “아, 이번주가 종강이구먼!”이라고 일부러 큰 소리로 농담을 건넨 적도 있다.

나의 얼굴 사진과 함께 종강을 알리는 포스터. 필자 제공

이번 학기 노동아카데미 종강수업은 한국 정부에 난민 지위를 신청한 팔레스타인 청년이 강의를 맡았다. 강사를 소개하면서 내가 부연 설명을 했다. “강의 제목이 ‘내가 팔레스타인에서 난민이 된 이유’인데, 지금 보니까 비문이네요. 팔레스타인 사람이 한국에 와서 난민 신청을 한 상태이니 ‘내가 팔레스타인에서 한국에 와 난민이 된 이유’가 정확한 제목일 것 같습니다.”

강의를 듣다가 내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청년은 1997년 가자시티의 난민 캠프에서 태어난 첫날부터, 스물일곱살이 된 지금까지 줄곧 ‘난민’ 신분이었던 것이다. 한국에 와서 비로소 난민이 된 줄로 알았으니 명색이 ‘주임교수’인 작자가 무식해도 너무 무식했다는 생각으로 강의와 질의응답이 끝날 때까지 두시간 동안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영상 자료가 충격적일 수 있으니 예민한 분들은 잠시 나가셔도 괜찮습니다”라는 안내와 함께 시작된 강의는 짧은 글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잠시 복도로 나왔다가 뒤따라 나온 수강생과 눈이 마주쳤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네요”라면서 서로 잠시 숨을 골랐다. 사진을 보여주며 소개했던 여러 친척들과 동료들이 차례로 사망했다는 내용이나, 자신이 다녔던 대학의 아름다운 교정이 잿더미로 변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사진은 차라리 덜 충격적이었다. 그 엄청난 고통이 지금 이 시각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질의응답 시간에는 예민한 질문도 나왔다. 무장투쟁 조직인 하마스에 대해 사람들이 다양한 시각을 갖고 있다는 질문이 나왔을 때, 그 청년은 조금 길게 설명한 뒤에 말했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비난이 가능하다면, 저도 하마스를 비난하겠습니다. 하마스가 없었다면 저도 행복했을 거예요. 그것은 이스라엘의 점령이 없었다는 뜻일 테니까요.” 그 말을 들으며 “독립운동가들이 없었다면 우리도 행복했을 것이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 지배가 없었다는 뜻일 테니까…”라고 생각한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루 노동자가 종강수업에서 강의하는 모습. 필자 제공

바로 옆 강의실에서는 노동아카데미 심화과정의 또 다른 종강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마루 노동자가 강의를 맡았다. 건설 현장에서 실내 마룻바닥을 시공하는 일을 하면서 하루 14시간, 주 90시간 노동을 하느라 온몸 관절에 골병이 들고 최저임금 수준의 소득으로 전국 각지를 돌며 식비와 숙박비까지 부담해야 하지만 노동법의 보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마루 노동자들의 실태를 들으며 수강생들은 호흡을 고르느라 바빴다. 양쪽 수업을 들락날락하며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하는 것이 내가 맡은 역할이어서 강의에 집중하지는 못했지만 잠깐 들어가 본 시간에는 그 노동자가 구구절절한 사연을 설명하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멈칫하는 모습이 보였다.

질의응답과 소감 발표까지 듣느라 밤늦은 시간이 돼서야 마무리됐다. 함께 온 동료 마루 노동자들과 함께 지방으로 급히 내려가야 한다며 인사도 제대로 못 나눈 채 황망히 떠났다. 서둘러 나가는 조끼 차림의 뒷모습을 보며 그 노동자들은 그렇게 그 고통 속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생각이 들어 학교를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난 16일 전주 팔복동 전주페이퍼 공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19살 노동자 ㄱ씨의 생전 메모장. 민주노총 전북본부 제공

집에 들어와, 입사 6개월 만에 제지공장에서 숨진 19살 노동자의 소식을 접했다. 그 청년이 공책에 또박또박 연필로 적은 “2024년 목표, 남에 대한 이야기 함부로 하지 않기, 하기 전에 겁먹지 말기, 기록하는 습관 들이기…”를 보고 있자니 눈시울이 뜨거워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다. “편집 기술 배우기, 카메라 찍는 구도 배우기, 경제에 대해 공부하기…” 이 세상에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여기까지 썼는데, 배터리공장 화재로 그렇게 꿈을 접은 채 숨진 노동자가 22명으로 확인됐다는 뉴스가 나온다. 차마 할 말이 없다.

자신은 먹고살 만하다고 이러한 일들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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