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그리고 메이저리거들의 숭고했던 희생[줌 인 MLB]
1950년 6월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1953년 7월27일 정전 협정이 맺어지기까지 3년 동안 한반도에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무수한 사람들이 죽었고, 도저히 회복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한국전쟁은 미국에도 깊은 의미로 남아있다. 자유주의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미군이 투입됐고, 3만7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들 가운데는 한창 활약하거나, 꽃을 피우려던 메이저리그 선수들도 있었다. 한국전쟁 74주년을 맞아, 참전했던 주요 선수들의 행적을 밟는 것으로 그들의 희생을 추모한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메이저리거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선수를 꼽으라면 단연 ‘타격의 신’ 테드 윌리엄스다. 윌리엄스는 1952년 참전해 1953년 7월까지 약 1년 반을 복무했다.
윌리엄스는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3년을 해군에서 콜세어기 비행교관으로 복무했다. 다만, 전장 투입을 위해 진주만에 대기하고 있던 도중 일본이 항복해 전쟁이 끝났다.
윌리엄스는 한국전쟁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며 38번의 출격을 했다. 그 과정에서 적의 대공포에 비행기 동체가 맞아 긴급 착륙하는 아찔한 일도 있었다. 다음은 윌리엄스의 ‘메이데이’ 콜을 들었던, 지금은 세상을 떠난 또 다른 메이저리거 참전용사 제리 콜먼과 바비 브라운이 2013년 USA투데이와 인터뷰에서 회상한 당시 상황이다.
“우린 당시 한국 깊숙한 곳에 있었다. 어느날 긴박한 메이데이 콜을 받았다. 어떤 남자가 북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는 K-55 부대에 있었는데, 바퀴도 펴지 않고 비행기를 착륙시켰다고 했다. 현장에 가보니 비행기가 불에 타고 있었다. 그 비행기 조종사가 윌리엄스였다.”(콜먼)
“당시 그는 매우 심한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한 달이나 병원에 머물렀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다. 매우 운이 좋았다.”(브라운)
윌리엄스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합쳐 약 5년 정도의 커리어를 손해봤다. 그것도 모두 전성기 때였다. 통산 타율 0.344, 521홈런, 1839타점, 출루율 0.482, 장타율 0.634의 엄청난 기록을 남긴 윌리엄스가 만약 전쟁에 나서지 않았다면,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가장 먼저 넘어선 선수는 행크 애런이 아니었을 수 있다.
콜먼 역시 윌리엄스처럼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모두 참전했다. 그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모두에서 직접 전투를 수행했던 유일한 메이저리거였다. 미 해병대에서 복무했던 그는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합쳐 도합 120회의 임무를 수행했고, 2개의 수훈 비행 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es), 13개의 에어 메달(Air Medal), 2개의 해군 공로 메달(Navy Citation)을 받았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뉴욕 양키스에서 뛰었던 덕분에 월드시리즈 우승반지도 5개나 얻었다.
하지만 콜먼은 전쟁에서 겪었던 경험을 외부에 얘기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너무 끔찍했던 기억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콜먼은 한국전쟁 당시 전투기를 타고 함께 출격했던 동료가 적의 포화에 맞아 머리를 떨구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콜먼은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양키스에서 나를 위한 행사를 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날 아침 7시에 전사한 그 동료의 처남이 ‘그의 부인이 남편의 행방을 알고 싶어 한다’고 전화를 했다”며 “당시 많은 미군이 전쟁 포로로 붙잡혀 송환되지 않은 경우가 있었고, 부인도 그러길 바라고 있었다. 5명의 아이를 둔 그 부인에게 남편이 전사했다고 말해야했던 건 바로 나였다”고 했다.
100명이 넘는 메이저리거가 참전했던 한국전쟁에서 유일하게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선수는 로버트 ‘밥’ 네이버스다. 1939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서 데뷔한 네이버스는 2차 세계대전 기간 미 공군에 입대해 캔자스주에 있는 항공 운송 훈련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군복무가 마음에 들었는지, 종전 후에도 메이저리그로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군에 남았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전장으로 투입됐다. B-26 전술 폭격기를 조종했던 네이버스는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폭격 임무를 수행했으나 1952년 8월 적의 대공포에 피격, 실종됐고 이후 사망이 최종 확인됐다.
버드 셀릭 전 MLB 커미셔너는 2000년 6월15일 알링턴 국립 묘지의 무명용사의 묘에서 진행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식에서 공군 장교로 복무하던 네이버스의 아들을 향해 “네이버스 소령은 국가에 대한 봉사라는 존경할 만한 윤리를 구현했다.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나라를 위해 해준 모든 일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월드시리즈 최다승 투수 화이티 포드, 얼마전 세상을 떠난 역대 최고의 외야수 윌리 메이스, 최초의 사이영상 수상자 돈 뉴컴, ‘미스터 컵스’ 어니 뱅크스도 한국전쟁 시절 군에서 복무한 위대한 선수들이다. 다만, 이들은 전쟁에 직접 투입되지는 않고 미국에서 대기했다. 하지만 전쟁 상황이 심각해지면 언제든 투입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콜먼이 생전에 “(전쟁 후에도) 저 사람들을 봤지만, 난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들 역시 전쟁으로 인해 커리어에 적잖은 손해를 봤다.
초 단위로 생사가 엇갈리는 전장. 그것도 낯선 타지의 한가운데에서도 그들이 생전 처음보는 한국 군인들과 힘을 합쳐 싸웠던 이유는 ‘자유와 평화’라는 가장 중요한 가치 때문이었다. 콜먼과 브라운은 생전 전쟁에 참전한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어떤 전쟁도 즐겁지 않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둘째는 내 조국이다. 만약 당신이 조국을 위해 싸울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명예다.”(콜먼)
“아무도 한국전쟁에 대해 묻지 않는다.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브라운)
윤은용 기자 plaimsto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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