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배제하면서, 저출생 ‘전환’? [세상읽기]
김혜정 |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어딜 가나 저출생이다. 총선 때부터 거대 양당은 ‘저출생’ 대책을 1번 공약으로 내세웠다. 22대 국회 개원 뒤 저출생 관련 법 개정안이 제일 먼저 발의되어 있기도 하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지난 19일 ‘저출생 추세 반전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그런데 요즘 저출생과 저출산 관련 발언을 하는 이들은 대개 남성-비청년들이다. 여성의 얼굴, 청년의 얼굴, 아동청소년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저출생’ 구호가 난무한다.
저출생 관련 대책 논의기구 중 대통령 소속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산하 일·생활 균형 위원회가 6월21일 13명 전원 남성으로 구성되었다는 소식이다. 경사노위 대변인은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지 않고 추천받아보니 그렇게 되었지, 차별 등의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이 말은 여성이 배제되는 지금 한국 정치를 표현한 한 문장 같다. 아무도 차별을 의도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또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모두(또는 대부분) 남성이 대표자의 자리를 차지한다.
일·생활 균형의 현실을 살펴보자. 2023년 8월 설문조사(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19~49살 남녀 2천명에게 아이를 낳을지 물었더니 ‘낳지 않을 생각’이라는 응답이 46.0%였다. 아이가 없는 기혼자도 그 비율이 24.7%에 이른다. 저출산 원인으로는 ‘일과 육아의 병행이 어려운 구조’를 제일 많이 꼽았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실시한 2023년 영유아 부모 대상 설문조사를 보면 그 실태가 드러난다. 맞벌이 가구 아동(0~7살) 어머니의 하루 평균 돌봄 시간은 11.69시간이다. 반면 아버지는 4.71시간, 돌봄기관에선 7.76시간, 조부모는 3.87시간에 그친다. 맞벌이 가구가 아닌 경우엔 어머니와 아버지의 하루 평균 아이 돌봄 시간이 각각 15.63시간, 4.40시간이었다.
자녀를 둔 양육자의 일·생활 균형이 가능하게 하려면, 단기 육아휴직이나 아빠 출산휴가를 며칠 더 늘리는 식의 땜질이 아닌 성평등한 돌봄사회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고용이 성평등하게 이뤄져야 하고 비정규 과다노동, 초단기 노동, 법 외 사각지대 고용시장을 줄여야 ‘함께 돌봄’이 가능해진다. 이런 고용 환경에 처한 이들에게 가계의 빚 부담을 늘리는 ‘신생아 대출 확대’ 방식의 저출생 대책은 결국 열악한 노동 시간을 늘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곧 인구전략기획부를 신설하고 여성가족부를 없애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낼 예정이라고 한다. ‘여성’은 배제하고 저출생을 단순히 ‘인구’ 문제로 규정하는 정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6월3일 한국 정부 대상 9차 권고에서 “가족 가치와 페미니즘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는” 데 대해 우려를 표했다. 또 가족과 사회에서 여성과 남성의 역할과 책임에 관한 고정관념이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가족부 폐지에 대해서는 “여성 발전을 위한 법·정책 체계의 파편화와 우선순위 하락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여성가족부 폐지와 인구전략기획부 신설은 여성을 삭제하고 출산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역행’이 아닐 수 없다.
출생과 양육이 단지 ‘인구’ 문제이기만 할까? 참여연대는 6월19일 논평에서 저출생 핵심 원인이 ‘불평등과 양극화 심화, 기후위기, 사교육, 지역 격차’ 등 ‘현재와 미래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 짚었다. “출산과 양육 중심의 단편적 접근에서 벗어나 삶의 질 제고, 가족다양성 존중, 비용 보장만이 아닌 시간 보장, 돌봄 노동에 대한 존중과 사회적 인정, 공공인프라 확충 등과 같은 다차원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삶이 피곤하고, 노동 시간이 과중하고, 기후위기가 심화하고, 주거비가 비싸고, 차별과 혐오와 폭력이 만연하고, 국회와 정부가 정쟁을 일삼는데 정부가 출생률 목표치를 높인다고 해서 아이를 낳게 될까? “0~4세 인구가 북한보다 적습니다”(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정책홍보자료)에서 보듯 출산율에도 남북 대결을 부추기는 정치적 편협함, 보수적 결혼·가족 이데올로기에 갇혀 끝내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겠다는 대통령과 현 정부의 아집은 되레 인구위기를 심화할 뿐이다. 저출생 대책의 패러다임 전환은 배제된 여성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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