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 넘어 시집 17권…다작해야 좋은 시도 많이 써”
“선배 시인들은 다작을 용납하지 않았어요. 정련된 시를 쓰려면 다작할 수 없다는 거죠. 시 작품 수를 적당한 양만 쓰는 과작을 미덕으로 보셨죠. 지금 저 홀로 선배 시인들의 그런 생각에 맞서고 있어요. 저는 많이 써야 좋은 작품도 많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소설가는 엄청 많은 분량의 글을 쓰잖아요. 시인도 그렇게 쓸 수 있다는 게 왜 용인이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최근 ‘b판시선’ 69번째 시집으로 ‘노인류’를 펴낸 하종오(70) 시인의 말이다. ‘노인류’는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시인의 42번째 시집이다. 그는 예순 이후인 지난 10년 모두 17권의 시집을 냈다. 나이 들어 시집을 내는 간격이 더 짧아졌다.
지난 19일 인천시 강화군 불은면 자택에서 만난 시인은 이런 말도 했다. “시인은 소설로 쓸 수 있는 온갖 거를 다 시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시 한 편에 단편소설 한 편 정도의 내용을 담으려고 해요. 시 공부도 제 시를 고치면서 하죠.”
1991년 강화에 처음 터를 잡은 시인은 11년 전에 아내와 함께 완전히 귀촌해 텃밭 농사와 시를 쓰며 살고 있다. “강화는 서쪽이라 묘한 서정성이 느껴집니다.”
그는 1980년대에 낸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사월에서 오월로’ 등으로 ‘민중주의 서정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시인 김정환에 따르면 그는 “80년도에 이미 민족시단의 황태자”였고 시인 황지우도 그의 시를 “언어 교과서”라고 추켜세웠다.
그가 나이 들어 쓴 시 역시 주인공은 ‘민중’이다. 시집 ‘국경 없는 농장’(2015)은 불은면 집 주변에서 보고 들은 농업이주민 노동자 이야기로 시적 상상력을 펼쳤고 판소리체시집 ‘악질가’(2022)는 지역 토호들이 권력과 손잡고 어떻게 힘없는 이들을 괴롭히는지 사실주의적 필치로 풍자했다. 접경지 강화에서 남북 분단의 풍경을 상상한 ‘남북주민보고서’(2013)나 러-우크라 전쟁에 장탄식하며 쓴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얘기하자?”’(2023)도 시선은 ‘악한의 무리에 고난을 겪는 작은 이들’에 닿아 있다. 그는 고라니, 참새 등 집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동물에도 시선을 돌려 시집 ‘신강화학파 12분파’(2016)를 냈다.
최근작 ‘노인류’는 제목처럼 노인의 세계를 사유하고 보고한 시집이다. “아랫지방 산천이나 윗지방 산천이나/ 별 다를 바 없다고 느낀다 (…)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은 감각으로 진화하고 있는 노인류,/ 나는 노인류이다.” 그가 시 ‘노인류의 진화’에서 그린 노인류의 한 속성이다. 그는 ‘노인류의 무관심’이란 시에서는 “노인류의 가장 곤혹스런 지점”은 “달리 어떻게 사용할 도리가 없는/ 남아도는 시간에 대하여/ 달리 어떻게 소비할 방법을 찾지 못하여/ 무작정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라고 짚은 뒤 “내가 시간에 무관심하면 나는 노인류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가/ 시간이 나에게 무관심하면 나는 노인류에 속하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자문한다.
그는 지난해 스스로 노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단다. “눈이 침침해지고 가는 귀가 먹고 생각만큼 말이 잘 나오지 않더군요. 시인으로서 특히 결정적인 것은 낱말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머리에 상은 잡히는데 표현할 낱말이 떠오르지 않아요. 시를 써놓고도 내가 쓴 낱말이 내가 생각한 뜻인지 신뢰하지 못해 다시 사전을 뒤적입니다. 그래서 끝없이 고칩니다. 예전에 시 한 편에 30번 퇴고했다면 요즘은 50번 정도 합니다.”
그가 노인의 현실에 대한 시를 써보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지난해다. “전에는 노인 문제를 생각은 했지만 시가 된다고 생각하지는 못했어요. 우리 문학사에서도 노인에 관한 시는 찾기 힘들어요. 그런데 지난해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내 연배의 노인을 시의 주인공으로 삼지 않은 것은 시인이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요. 내 문제이기도 한 노인의 현실에 대해 시를 짓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리얼리즘이라는 생각이었죠.”
그는 요즘 가끔 서울 나들이를 한다. “노인들이 많이 모이는 종로 탑골공원 등을 갑니다. 도시 노인에 대한 관심 때문이죠. 앞으로도 노인 시를 계속 쓰려고요.”
75년 등단해 최근까지 시집 42권
“적당량 쓰라는 선배들에 홀로 맞서”
80년대 대표적인 ‘서정적 민중시인’
나이 들어서도 시 주인공은 ‘민중’
최근작은 동년배 노인 현실에 초점
“노인도 다른 연령대와 똑같은 욕망”
“중학 선배 이육사, 시 창작에 영향
조병화 시인 53집 기록 넘기고 싶어”
‘노인류’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뭐냐는 물음에 그는 “노인도 다른 연령대와 똑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신체적으로 허약할 뿐 노인도 모든 계층의 인간들과 똑같은 속성을 유지하고 있어요. 세상은 노인의 이런 모습을 바로보지 못하고 노인을 완전히 다른 부류로 취급합니다.” 그는 현실에서 예를 들었다. “제 경험인데요. 관공서나 금융기관을 가면 너무 노인 대접을 하더군요. 공경의 대상으로 보면서 예외적인 존재로 취급한다는 게 느껴집니다. 그게 노인을 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인 것 같습니다.”
강화에서 본 ‘한국 노인류의 가장 큰 문제’가 뭐냐는 질문에는 이렇게 받았다. “예전 농촌 지역에 있던 이웃 관계의 친밀함이 사라지고 공동체라는 낱말만 남았어요. 국가가 노인 문제를 책임지면서 이웃과 이웃이 서로 보살피던 공동체가 무너지고, 이제는 행정 공동체가 되었죠. 거기서 노인 권력층이 나오고 노인들은 정치에 이용당하고 있어요. 노인 집단이 다 표잖아요. 제가 사는 곳도 인구소멸지역이라 노인층을 잡아야 권력을 잡을 수 있거든요.”
초등학교 졸업 무렵 김소월 시에 매혹되어 결국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그는 요즈음 대부분 시간을 시작에 쓰고 있다. “아내와 함께 약 200평 텃밭 농사를 짓는데요. 대략 주 5시간 농사일을 빼고는 시 쓰기에 몰두하고 있어요.” 그는 이번 시집 서문에서 “나의 생애 시를 더는 쓸 수 없는 시간이 온다면 안락사를 허용하는 곳으로 가서 죽기를 소망한다”고 썼다.
등단 초기 시인으로서 그의 목표는 ‘시 2천 편 창작’이었단다. 거기에 도달한 지 꽤 된 지금은 시집을 최소 54권은 내야겠다고 맘먹고 있다. “70년대 후반에 다산 정약용 공부를 홀로 했는데요. 다산이 시를 2천 편 썼더군요. 다산은 천재라 경서 등 다른 책을 쓰면서 시를 그만큼 지었으니 저는 시라도 2천 편 써야겠다고 자기서원을 했죠. 지금은 조병화 시인이 낸 53권 시집 기록을 넘어서고 싶어요. 조 시인은 독재부역하고 잘 먹고 잘 살면서도 53권을 냈잖아요. 저는 독재부역도 안 했고 교수도 안 했으니 시집은 조 시인보다 한 권은 더 내야죠.” 그는 4년 전 펴낸 시집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서정주, 김춘수 등 친일을 했거나 독재에 부역한 시인들을 비판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문인의 친일, 독재 부역은 많은 사람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죠.”
그는 자신이 시인이 된 데는 독립운동가 이육사 시인의 영향이 크다고도 했다. “제가 중학교 문예반에서 시 습작을 했는데요. 일제 때 이육사 시인이 제가 나온 대구 대륜중을 다녔어요. 이게 시인 지망생으로서 저에게 대단한 긍지를 심어주었어요. 제가 시인이 되는 큰 추동력이었죠.”
그는 “젊어서 시를 쓰고 나이 들면 소설을 쓴다는 말도 있지만 지금은 그 반대가 되어야 할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예전에는 젊었을 때 할 수 있는 경험의 한계가 있었어요. 태어난 곳 외 여행도 어렵고 세상 경험이 없으니 자기 내면세계나 서정이 중심이 된 시를 쓰고 나이 들어 집을 떠나 경험을 축적하면 소설을 쓰기 쉽다는 생각이었죠. 지금은 반대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여행도 많이 하고 미디어 발달로 세상에 대한 이해도 노인들에 비해 깊어요. 또 예전엔 40~50대도 노인층이었지만 지금은 노인층 연령이 높아져 체력의 한계로 노인들은 소설 쓰기가 쉽지 않아요. 시가 더 적합하죠.”
그는 1990년에 민중시가 정치적 구호로 변질했다며 절필 선언을 해 문단에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요즈음 한국 시단은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다. 답은 “좋은 리얼리즘 시를 찾기 힘들다”이다. “요즘 젊은 시인들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를 많이 쓰는데요. 저는 그런 시들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더군요.” 왜 리얼리즘일까? “리얼리즘은 현실주의, 사실주의로 번역되는데요. 현실과 사실이 없으면 허구가 됩니다.”
후배 작가 중 누가 좋은 시를 쓰냐는 말에는 손택수라는 이름이 나왔다. “손택수 시는 리얼리즘 계열의 영향을 받았지만 리얼리즘 시는 아닙니다. 하지만 리얼리즘인지 아닌지를 떠나 시를 잘 씁니다. 그런 시가 좋은 시이죠.”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1984년 스카우트되어 들어간 창작과비평사 편집차장 자리에서 6개월도 안 되어 도망치듯 물러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웅진 출판에서 일할 때 창작과비평사 쪽 제안으로 백낙청 교수 등의 면접 심사를 받고 창비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만나는 분들이 당대의 쟁쟁한 문학가와 저명한 학자들이라 주눅이 들더군요. 큰 나무 밑에서 작은 나무가 자라지 못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기가 죽어 도저히 시를 쓸 수 없어 몇 달도 안 돼 도망쳤어요. 도망친 첫날 해남의 김지하 시인에게 갔더니 김 시인이 그만두길 잘했다고 하더군요. 그 뒤 옮겨간 웅진에서도 이사에 선임되자마자 사직했어요. 시를 못 쓸 것 같아서요.”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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