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비트 컴퓨터`에 홀딱 반한 소년, `쿵푸팬더 4`의 리드 개발자 되다 [오늘의 DT인]
개인용 컴퓨터 도입 때 자라 대학서 컴퓨터공학 전공
병역특례로 입사한 IT회사서 첫 개발 시작
디즈니 거쳐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서 근무
"사내 리더십 포지션서 일하기 원해"
그 즈음 서울은 유난히 뜨거웠다. 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이었던 나라가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의 경제 성장을 이루고, '세계인의 축제'라는 올림픽 개최까지 앞두고 있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겠다. '아 대한민국'을 부른 가수 정수라는 후에 "하늘에 조각구름~ 강물엔 유람선~" 하는 노래 가사와는 달리 녹음 당시 한강에는 유람선이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저 희망에 대한 노래였고 결국엔 실현적 예언이 됐다고. 우리 사회는 거의 모든 면에서 성장하고 또 변화하고 있었다.
소년에게도 일생을 사로잡을 만한 변화가 찾아왔다. 아파트 같은 동에 사는 친구의 집에서 애플의 8비트 개인용 컴퓨터를 보게 된 것이었다. 컴퓨터 라는 박스 모양 기계에 마음을 홀딱 빼앗겨 버린 소년은 매일 같이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적지 않은 값을 치르고 컴퓨터란 '놈'을 들여 놓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은 우후죽순 생겨난 컴퓨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컴퓨터 잡지를 구독해 거기 나온 프로그램 코드를 더듬더듬 타이핑해 실행시켜 보는 것으로 소일했다. 이른바 '피씨(PC) 키즈'의 탄생이었다.
"한창 국내에 개인용 컴퓨터가 도입될 때였으니까 그 때 자라난 세대라고 할 수 있지요. 학창시절 내내 컴퓨터 서클 활동을 하면서 축제 때는 직접 개발한 프로그램을 전시하기도 했고, 자연스럽게 대학에서도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게 됐어요. 병역특례로 작은 IT 회사에 들어가서 광고에 들어가는 프로그램 개발 일을 한 것으로 커리어를 시작했어요."
미국의 대표 애니메이션 제작사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에서 9년째 일하고 있는 전계도(50·사진) 리드 테크니컬 디렉터(TD)의 이야기다. 그는 최근 히트작 '쿵푸팬더 4'의 리드 TD로 참여했다.
"지금은 디즈니에 합병된 픽사(PIXAR) 같은 회사를 보면서 '저런 회사에서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했지 실상은 밤샘과 격무에 시달리던 평범한 초년생이었어요. 우연히 미국에 장기 출장을 갔다가 지사 직원이 됐고, 취업비자를 받아 미국 생활을 시작하게 됐어요. 미국에 있는 일본계 기업 등을 거쳐 디즈니로 이직을 했습니다."
고생스러웠지만 첫 회사에서 TV 방송 관련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을 익혀 자연스럽게 영상 전문 그래픽스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 업무에 전문성이 생겼다. 2007년부터 2016년까지 디즈니에서 9년 근무하면서 온라인 게임 '툰타운 온라인', '캐러비안의 해적 온라인', '월드 오브 카 온라인' 등과 애니메이션에 사물인터넷을 구현한 스마트토이 '플레이메이션'을 개발했다.
"장편 애니메이션은 컴퓨터로 영화를 만드는 거니까 아티스트들이 그림을 그리고 컴퓨터 전문 기술을 가진 프로그래머들이 이를 구현합니다. 각 영화에 직접 참여하는 아티스트와 TD들이 있고 별도로 소프트웨어 개발을 담당하는 부서에 속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있어요. TD들은 이 개발자와 아티스트 간, 또 아티스트와 아티스트 간에 협업을 위해 데이터 등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는 거죠."
영화 한 편당 보통 수퍼바이징 TD가 1명, 리드 TD가 1명, 그외 일반 TD가 여러명이 참여한다. 이들은 내부 선발인 '캐스팅'을 통해 영화에 투입된다. 모델링, 룩뎁(Look development), 애니메이션, 라이팅 등 애니메이션 제작의 각 분야를 담당하는 아티스트들의 부서가 있는데 일반 TD들이 해당 영화의 각 부서에 배치되고, 수퍼바이징 TD와 리드TD는 영화 제작의 전 과정을 담당한다.
영화마다 감독의 면접을 거쳐 수퍼바이징 TD를 결정하고, 아티스트 부서의 헤드들도 마찬가지다. 리드 TD는 수퍼바이징 TD가 추천해서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TD들은 스케줄과 각자의 선호부서 등에 따라 선발된다. 영화 한 편에 300~400명이 투입되고, 제작 기간은 통상 2-3년 정도다. "영화 하나가 하나의 스타트업인 셈이에요. 대부분의 TD는 저와 같이 컴퓨터공학 전공자가 많지만 미술을 전공해 아티스트로 일하는사람 중에 나중에 코딩을 배워서 TD가 된 경우도 꽤 있어요."
유학도 한 적이 없는 국내파 프로그래머에겐 언어의 장벽도 높았을 거라 짐작했다. "컴퓨터를 잘 다루려면 영어를 해야 하니까 어려서부터 영어에 대한 감각이 길러질 수 있었어요. 사실 영어보다 어려운 건 문화 차이였어요. 미국인 동료들이 자라면서 봐 온 영화, 드라마, 만화 같은 것들이요. 엔터 쪽 일을 하려면 이들이 유년시절에 보던 것 다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63년 처음 나온 마블의 카툰 '아이언맨'이나 1986년작 '왓치맨' 같은 것들이요. 원작까지 모두 찾아 읽었어요."
드림웍스에 있으면서 제작에 참여한 작품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들도 있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제작됐던 '장화신은 고양이 2'가 기억에 남아요. 상업적으로도 흥행했지만 유화(오일 페인팅)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을 기술로 구현한 것이 호평을 받아 굉장히 보람이 있었어요. 당연히 리드 TD가 돼 참여한 첫 영화 '쿵푸 팬더 4' 또한 잊을 수 없죠. 사내에서도 10년 만에 상업적으로 대성공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전 TD가 일하는 드림웍스는 포브스가 선정한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꼽힌다. 그가 일하는 헐리우드에는 실리콘밸리와 다른 기업 문화가 있다고 한다. "영화 나올 때마다 다 모여서 '랩 파티(wrap party)'를 하고 축하를 해줘요. 신기할 정도로 다들 착해요. 조직 안에서 서로 밟고 경쟁하기보다는 뭐든 같이 하고 도우려고 하고요. 동료들끼리 취미 활동도 함께 하는데, 자발적으로 창작 뮤지컬 공연을 올리고 자기들끼리 오디션도 보고요. 이를테면 대학 동아리 같은 문화랄까요. 더 좋은 처우에도 실리콘밸리로 떠나지 않고 남은 개발자들 대부분이 '사람이 좋아서'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앞으로 계획이 궁금했다. 전 TD는 "한국인은 의사결정 과정에 초기부터 직접 관여하는 리더십 포지션에 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하는데, 그때문이라도 진급을 통해 리더의 위치에서 일하고 싶다"면서 "단기적으로 수퍼바이징 TD가 되고 싶고, 기회가 있으면 사내 리더십 포지션에서 일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해외 취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드림웍스를 비롯해 미국 헐리우드 산업 내에도 많은 한국인들이 활약하고 있어요. 해외 취업에 있어서는 영어도 물론 열심히 익혀야 하지만 현지의 문화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중요해요. 아티스트든 기술자이든 자신의 '박스' 안에서 벗어나서 '인터디파트먼트(interdepartment·통섭)' 하는 것, 그러니까 다른 전문분야와 원활히 커뮤니케이션 하는 것 또한 요구되는 분위기에요. 일종의 '통역가'가 되는 것이죠."
이윤희기자 stel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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