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지돈 "제 잘못" 사과했지만…'사생활 동의 없는 재현' 언제까지
김봉곤·김세희 등 작가들 비슷한 논란 반복
“문학계에서 상황 갈무리하고 입장 내놔야”
김봉곤, 김세희 그리고 정지돈까지. 타인의 사생활이나 타인과 자신 사이의 이야기를 동의를 구하지 않고 소설로 썼다는 의혹으로 거센 비판을 받은 작가들이다. 2020년 이후 이 같은 ‘창작의 윤리’ 논란이 벌어진 건 세 번째. 이번엔 ‘젊은작가상’ ‘문지문학상’ 등을 받으며 활발히 활동해 온 소설가 정지돈(41)이다.
정 작가의 과거 연인은 지난 23일 정 작가가 자신의 일화를 소설에 무단 인용했다고 주장하면서 해당 소설의 출판 중지와 회수, 정 작가의 사과를 요구했다. 정 작가는 25일 사과의 뜻을 밝혔다. 다만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 비슷한 문제는 얼마든지 또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것이 문학계의 시선이다. 이번 사태를 정 작가의 '일탈'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정지돈 ‘사과’했지만… “개인의 삶 도용 안 해”
아프리카TV와 유튜브에 독서 콘텐츠를 올리던 방송인 김현지(35)씨는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정 작가가 연인 사이일 때 나눈 이야기들을 2019년 이별 이후 허락 없이 소설에 인용했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문제 삼은 소설은 ‘야간 경비원의 일기’(현대문학·2019)와 ‘브레이브 뉴 휴먼’(은행나무·2024)이다. ‘야간 경비원의 일기’에서 스토킹에 시달리는 ‘에이치(H)’라는 인물의 거주지와 스토킹을 계기로 소설 속 ‘나’와 에이치가 가까워진다는 설정이 김씨가 겪은 일의 흐름과 일치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 ‘브레이브 뉴 휴먼’에서 김씨와 이름이 같은 인물 ‘권정현지’의 서사 역시 “사귀던 시절 들려주고 보여준 제 이야기”라고 했다.
김씨는 ①무단 인용 인정 ②공식 채널을 통한 사과 ③재발 방지 약속을 정 작가에게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공개했다. 이에 비판이 커지자 정 작가는 “저의 부주의로 벌어진 일이며, 제 잘못”이라고 김씨에게 사과했다. 출판사에 ‘야간 경비원의 일기’의 판매 중단을 요청하고, ‘브레이브 뉴 휴먼’에 대해서도 후속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다.
정 작가는 다만 '권정현지'란 이름이나 소설 속 이야기는 “김씨 개인의 삶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서 ‘아간 경비원의 일기’도 “직접 경험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몇몇 모티프만으로 개인의 삶이 도용됐으며 소설 속 인물이 실제 인물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여론 비판→사과문→작품 판매 중지하면 그만?
2020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나눈 지인과의 사적 대화를 단편소설집 '여름, 스피드'(문학동네·2018)와 '시절과 기분'(창비·2020)에 인용했다는 시비에 휘말린 김봉곤 작가의 이름도 소환됐다. 두 소설집은 절판됐고 김 작가는 젊은작가상을 반납했다. 2021년에는 김세희 작가의 장편소설 ‘항구의 사랑’(민음사·2019)에 자신의 사생활이 실려 아우팅(본인의 의사에 반한 성 정체성 공개) 피해를 입었다는 지인이 등장하면서 역시 절판됐다.
‘자전 소설’이나 진실과 허구 사이의 ‘오토픽션’은 엄연한 문학 장르이지만, '당사자의 허락 없는 재현'까지 문학 독자들이 용인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이번 사태는 보여준다. 문학과 창작의 이름으로 사생활을 침해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무단 인용은 '비판 고조→작가의 사과문 발표→작품 판매 중단'을 거치면 이내 잠잠해졌다. 문학계의 논의로 확산되지 못했다. 김세희 작가는 2022년 경장편 소설 '프리랜서의 자부심'(창비)을 출간했고, 김봉곤 작가도 지난해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신작 단편을 발표했다. 두 작가 모두 논란에 대한 입장 표명은 없었다.
정 작가도 비슷한 수순을 밟게 될까. 비평가 이연숙은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정 작가의 의혹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조만간 문학계에서도 상황을 갈무리하고 ‘입장’을 내놓는 논평을 읽을 수 있길 바란다.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는 이야기는 이제 진짜 그만해야 된다.” 이제라도 '사생활 인용 원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의미다.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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