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아 연극하죠"

김형주 기자(livebythesun@mk.co.kr) 2024. 6. 25.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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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동산' 주역 손상규 인터뷰
법대 재학중 무대 연기에 반해
한예종에 입학해 배우의 길로
"콘텐츠 넘치는 OTT 시대에
현장성 가진 연극의 가치 커"
7월 7일까지 LG아트센터 공연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연극 '벚꽃동산'에 출연한 배우 손상규. LG아트센터

배우 손상규(47)가 연극 '벚꽃동산'에서 맡은 배역 송재영은 매번 달라진다. 소총의 영점 조절을 하듯 공연마다 연기의 톤에 변화를 주고 있다.

"어느 날은 더 귀여웠다가 다른 날에는 인물이 조금 재미가 없어지더라도 까칠하게 표현하죠. 연습 과정에서 계속 바꾸며 실험했던 것들을 연출가의 의도가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시도하고 있어요."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이 연극에서 송재영은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무대에 익숙해진 듯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다르게 연기하려고 한다.

'벚꽃동산'은 스톤이 러시아 극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대표작을 현대 한국을 배경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원작이 러시아 농노 해방(1861)과 러시아 혁명(1917) 사이 격변기에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듯이 스톤의 '벚꽃동산'은 정경유착으로 성장한 한국 재벌의 후손들이 시대에 뒤처지며 몰락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스마트폰 사용에 서툴고 구형 타자기를 애용하는 송재영(원작 인물 가예프)은 과거의 방식에 집착해 가문의 기업을 말아먹는 무능한 인물이다. 동생 송도영(전도연, 원작 인물 류바)과 조카들을 사랑하지만 그들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을 만큼 사회성이 떨어진다. 손 배우는 "송재영은 자신의 세계에 빠져 현실 감각을 잃은 인물"이라며 "처음에는 노는 것을 좋아해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는 캐릭터로 그리려 했는데 스톤과 논의하면서 소심하고 자폐적인 인물로 바꿨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양종욱·양조아 배우, 박지혜 연출가 등으로 구성된 양손프로젝트에서 연극 '개는 맹수다' '전락' 등을 선보이며 연극 판의 총아로 자리 잡았고, '살아있는 것을 수선하기' '오셀로' '메디아' 등에 출연했다. 2017년 동아연극상 유인촌신인연기상을 받았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괴물' 등 매체 작품에도 꾸준히 얼굴을 보이고 있다.

손 배우가 '벚꽃동산' 출연을 결심한 것은 전 세계를 누비며 입센, 체호프 등의 고전을 각 나라의 현대 배경에 맞게 재해석하는 스톤의 작업에 흥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고전에서 정수를 뽑아낸 뒤 현시대에 날카롭게 적용하는 통찰력과, 배우들이 그것을 체화해 자신의 것으로 표현하게 하는 작업 과정이 궁금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무대 위 배우들을 현실의 인물처럼 존재하게 하는 연출이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스톤은 배우들이 공연 중 실제로 음식을 먹게 하고 무대 위 집 안에서는 진짜 집처럼 싱크대에 물을 틀 수 있게 했다. 대사를 할 때는 현실의 대화처럼 동시다발적으로 말하게 하기도 했다. 관객들이 대사를 구분하지 못할 것을 배우들이 우려하면 "지금은 내러티브가 아니라 인물 간의 역학과 에너지를 전달할 거야" "왁자지껄 떠들다 갑자기 조용해질 때 찾아오는 느낌을 의도할 거야"라고 설득했다. 손 배우는 "스톤은 배우들이 정말 그 인물로 존재하길 바랐던 것 같다"며 "관객의 반응조차 신경 쓰지 말고 인물에 집중하게 했고 그 과정이 아주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한때 법조인을 꿈꿨던 그가 연극에 투신한 것은 평생 지루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연세대 법대를 다니던 26세에 연극 동아리에 들어갔고 방학에 공연을 준비하던 중 계속 이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들어갔다. 그는 "연극반 선배인 김동곤 배우로부터 작품에 대해 조언을 듣다가 하나의 장면, 하나의 작은 행동으로 인간의 감정을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연극의 시적 순간을 포착했다"며 "그 순간 저절로 고개가 하늘로 향하면서 '나는 이것을 하며 살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손 배우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의 발달로 콘텐츠가 손쉽게 소비되는 시대에 연극이 더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배우와 관객, 관객과 관객이 함께 호흡하고, 매 공연이 새로운 가능성을 품는 연극은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콘텐츠들에 없는 아우라가 있기 때문이다. 손 배우는 "저의 주변에는 예술이 배달음식처럼 소비되는 시대에 '연극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끝없이 복제되고 보자마자 잊히는 콘텐츠들 사이에서 연극의 현장성과 불확정성은 더 소중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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