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막으려다 일본 군사개입 빌미준 고종의 오판

길윤형 기자 2024. 6. 2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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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윤형의 조선의 갈림길 _09

고종과 민영준이 결정을 뒤집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대신들은 대경실색했다. 조선 내 대표적인 ‘지일파’이자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되는 김가진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보탰다. “일이 이 지경이 되어, 어쩌면 조선의 망조가 이것에 의해 연유하지 않을까 한다.”

민영준(1852~1932)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할 당시 민씨 척족을 대표하는 세도로 위안스카이를 통해 청에 원병을 요청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대 기록을 보면, 민영준의 부정부패와 탐학을 고발하는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1901년 민영휘로 개명했고, 나라가 망한 뒤에는 기업가로 거듭나 조선 최고의 갑부가 됐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날 모인 이들 가운데 자신들 행동이 조선이 망국으로 가는 ‘거대한 수레바퀴’를 돌리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는 단 한명도 없었을 것이다. ‘탐관오리’ 조병갑(1844~1912)의 학정에 시름 하던 민초들이 전라도 고부군 서부면 신중리 대뫼(竹山) 마을 송두호의 집에 모여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을 효수한다’고 결의한 것은 계사년 11월(1893년 12월 초~1894년 1월 초)이었다. 회의를 끝낸 이들은 이날 결정 내용을 여러 이름을 사발처럼 원 모양으로 돌려 써 주모자를 알 수 없게 한 ‘사발통문’에 옮겨 적었다. 1968년 12월 고부면 주민 송준섭의 집 마루 밑에서 7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족보에서 발견된 이 문서에 서명한 이는 모두 20명이었다. 그 안에서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의 이름도 확인할 수 있다.

농민들은 이날 결의대로 1894년 2월14일 봉기를 일으킨 뒤 이튿날 오전 고부 관아를 습격했다. 모든 일의 ‘원흉’인 조병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전주로 내뺀 뒤였다. 후임 군수 박원명이 부임해 와 선처를 베풀기 시작하자 농민들의 분노는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사태가 다시 험악하게 돌아가게 된 것은 ‘안핵사’(按覈使·지방에서 일이 발생했을 때 처리를 위해 파견하는 임시직)로 임명된 장흥부사 이용태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그가 동학을 적대시하며 민란에 참여한 이들을 잡아 죽이려 하자, 농민들은 4월25일 무장(현 고창)에서 ‘보국안민’을 내걸고 다시 봉기했다. 세가 점점 늘어난 동학군은 5월1~3일 백산(부안) 대회를 열어 전봉준을 총대장, 손화중·김개남을 총관령으로 뽑았다. 이들은 격문을 내어 “우리가 의를 내걸고 여기에 이르게 됨은 (중략)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라고 외쳤다.

크게 놀란 조선 정부는 5월6일 민씨 척족이 가장 신뢰하는 무장 홍계훈(?~1895)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해 서울을 지키던 최정예 부대 경군(京軍) 800명으로 동학군을 진압하게 했다. 이 사이 기세가 오른 동학군은 부안(8일)을 습격한 뒤 10~11일 황토현(정읍)에서 관군인 전라감영군(지방군)을 격파했다. 홍계훈은 정면 대결이 부담스러웠는지 5월23일 “지금 사세가 우리는 수가 적고 저들은 많아서 군대를 나눠서 추격하기 어렵다”며 “외국 군대를 빌려”야 한다고 장계를 올렸다.

스기무라 후카시(1848~1906)는 1880년부터 1895년까지 16년 가운데 2년을 제외하고 조선에서만 장기 근무한 일본 외무성 최고의 조선 전문가였다. 이 기간에 갑신정변(1884)·청일전쟁(1894)·을미사변(1895) 등 조선에서 발생한 여러 복잡다단한 사건에 깊숙이 관여했다. 특히 을미사변에 가담한 사실이 드러나 본국애 소환됐다. 1896년 1월20일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서 열린 예심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그가 남긴 ‘재한고심록’은 이 시대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1급 사료로 평가받는다.

이 무렵 주조선 일본공사관엔 휴가로 자리를 비운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를 대신해 차석인 스기무라 후카시(1848~1906) 1등 서기관이 대리공사를 맡고 있었다. 1880~1890년대 조-일 관계사를 논할 때 절대 빠뜨릴 수 없는 ‘문제적 인물’인 스기무라는 당시 조선의 속사정을 손바닥 보듯 꿰뚫었다. 그는 22일 무쓰 무네미쓰(1844~1897) 외무대신 앞으로 보낸 기밀문서 ‘전라·충청 양도의 민란에 대한 비견(鄙見·천한 의견) 상신의 건'(28일 외무성 도착)에서 “관군이 계속 패하고 민군이 승리한 기세를 몰아 북상하게 되면 이 정부(조선)가 어떻게 처치할지 미리 연구할 필요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130년 전 일본 외교관이 내놓은 정세 분석의 정확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제1책, 재빨리 내정 개혁을 시행해 국민이 가장 싫어하는 폐해를 제거하고 이를 통해 난당(亂黨)을 회유한다. 제2책, 병사를 지나(청)에서 빌려 이를 통해 난당과 시비를 가린다. 제1책은 여러 대신 중 2~3명이 이런 뜻이 있지만, 공공연히 말하기를 꺼리고, 제2책은 (당대 최고 세도가인) 민영준(1852~1935)이 주로 주장하고 있다. (중략) 제1책은 목하 권세가 왕성한 민씨에게 불이익이 되기 때문에 국왕이 영단을 내린다 해도 이를 실행하려면, 민씨를 떨쳐내고 정부 밖으로 축출하지 않는 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중략) 결국 제2책의 고식 수단을 취하게 될 것이다.”

스기무라 후카시 주조선 대리공사가 6월1일 조선 정부가 청의 위안스카이(원세개)에게 청병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급히 알려온 전문. 영어와 한문을 섞어 작성(“全州 fell into hands off rebels yesterday. 袁世凱 said Corean government asked Chinese reinforcement.”)돼 있는 게 눈길을 끈다. 이튿날인 2일 이 전문을 받아든 무쓰 무네미쓰(1844~1897) 외무대신은 그 직후 열린 각의에서 조선에 파병해야 한다는 결정을 이끌어 낸다. 전문을 확인한 뒤 바로 회의에 참석했는지 ‘대신’란 아래에 확인용 도장이 찍혀 있지 않다. 일본 외무성 제공

스기무라는 고종이 청에 파병을 요청해 “지나의 군사가 입한(入韓)한다면, 우리 관민 보호를 위해 또 일·청 양국의 권형(権衡·힘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민란이 진정돼 청병이 물러날 때까지 (일본도) 출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이 청에 병사를 요청하는 순간 동학농민혁명은 조선의 ‘국내 문제’에서 1885년 4월 톈진조약 이후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온 청·일의 세력 균형을 흔드는 복잡한 ‘국제 현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끔찍한 사태를 피하려면, 조선 스스로 이 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이를 가장 민감하게 느끼고 있던 이들은 당대 조선의 위정자들이었다. 스기무라는 23일 외무성으로 보낸 또다른 전문에서 조선 조정에서 벌어진 ‘격론’을 생생하게 소개한다. 민영준이 청의 군대를 빌어올 것을 계속 주장했지만, 다른 대신들이 강하게 반대하며 이를 저지한 것이다. 대신들은 “국가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데 몇만명의 생령을 죽일 순 없다”, “외국군이 오면 경향(京鄕)에 그 폐단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각국 공사들도 반드시 군대를 불러 이들 사이에 알력이 생긴다”며 청에 도움을 구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고종도 “원병을 청하는 일은 그만두고 다시 거론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다”고 결론 낸다. 지독한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조선에도 ‘최소한의 상식’은 살아 있었다.

이 지당한 결론이 뒤집힌 것은 동학군이 27일 황룡촌(장성)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조선의 정예군을 격파하고, 31일엔 전라도의 핵심 도시 전주를 점령했다는 급보가 전해진 뒤였다. 국정의 총책임자인 고종이나 훗날 ‘식민지 조선’의 최고 갑부 ‘민영휘’로 변신하게 되는 민영준은 한 나라를 이끌어갈 역량이 없는 이들이었다. 패닉에 빠진 민영준은 그날 바로 청의 위안스카이(원세개)를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이 보고를 받은 북양대신 리훙장(이훙창)은 이튿날인 광서 20년(1894년) 4월28일(양력 6월1일) 유시(오후 5~7시)에 총리아문에 “(조선) 국왕은 병사가 적은데 추가로 보낼 수도 없고 또 그 병사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삼아 중국에 군대를 보내어 대신 토벌해 줄 것을 청하였다”고 보고했다.

청의 파병이 결정됐으니 남은 것은 일본의 선택이었다. 훗날 세계 2차대전의 에이(A)급 전범으로 처형되는 도조 히데키의 부친인 히데노리(1855~1913)는 이 무렵 일본 참모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1897년에 쓴 저서 ‘정청용병격벽청담’(征淸用兵隔璧聽談)에 일본이 파병을 결단하고 실행하는 과정을 매우 솔직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다. 이 무렵 일본 육군은 청이 민란 진압을 명분으로 조선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 합병을 시도할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참모본부는 이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이치지 고스케 소좌(소령) 참모본부 제2국 국장대리를 조선에 파견했다. 현지를 둘러보고 온 이치지는 5월30일 가와카미 소로쿠 참모차장에게 “이 소문이 결코 와전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보고했다.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을 때 일본 육군 참모차장이었던 가와카미 소로쿠(1848~1899)는 대조선·대청 강경 정책으로 청일전쟁 개전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청이 조선에 파병을 하면 조선의 속방화가 더 가속화될 것으로 보고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설득해 대규모 파병을 실현시켰다. 이후 전쟁 기간 동안 대본영에서 일본 육군의 주요 참모로 일하며 작전 수립과 실행을 주도했다. 일본국립국회도서관 제공

청이 그런 야심을 품고 있다면, 일본 역시 이 “예측할 수 없는 변란”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에 대병력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가와카미는 31일 이토 히로부미 총리를 찾아가 “조선 정부가 독력으로 내란을 진압할 능력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라며 파병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해 동의를 끌어낸다. 정부 차원의 정식 파병 결정은 이틀 뒤인 6월2일 각의에서 이뤄졌다. 파병 목적이 단순한 ‘관민 보호’가 아닌 ‘일·청 양국의 권형 유지’가 됐으니 출병 규모는 100~200명의 소규모가 아닌 1개 혼성여단 8000명이라는 대규모가 될 수밖에 없었다.

고종과 민영준이 애초 결정을 뒤집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대신들은 대경실색했다. 깐깐했던 원로 대신 김병시는 “비도(匪徒·동학군)도 우리 백성이다.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일본의 문제도 근심이 없을 수 없다”고 말했다. 조선 내 대표적인 ‘지일파’였던 김가진(1846~1922)과 유길준은 크게 낙담했다. 이들은 6일 찾아온 스기무라에게 이번 사태는 “매관매직이 원인으로 민란이 더 창궐해서 위세를 떨치게 되면 민씨 일족의 지위에 위험을 준다”며 저들도 “청의 군대를 빌려오면 큰 해가 된다는 걸을 알고 있지만, 일부러 모른 체한다”고 말했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되는 김가진은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보탰다. “일이 이 지경이 되어, 어쩌면 조선의 망조가 이것에 의해 연유하지 않을까 한다.” 그는 몰려온 청의 병사들로 인해 조선이 망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겠지만, 정작 한반도에 ‘검은 야심’을 품고 있던 세력은 이 말을 태연히 듣고 본국에 보고까지 한 일본이었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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