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대기업 계약인 줄 알았더니 구글링해도 안나오는 소기업”… 발주처 미공개 공시제도 허점
계약 상대·금액도 안 밝혀… 제도 빈틈 악용한 깜깜이 공시 늘어
호재성 공시에 주가 급등했다가 급락 속출… 제재 수위도 약해
올 들어 코스닥시장에서 대규모 공급 계약을 공시해 주가를 띄운 후 계약을 철회하는 사례가 늘었다. 특히 허술한 제도를 이용해 계약 상대나 정확한 계약 금액을 공개하지 않은 채 호재성 공시를 낸 후 돌연 취소하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다. 뜬소문에 투자했다가 계약 해지 발표 후 주가가 급락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어 주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대규모 수주 계약 공시 1년 후 돌연 해지 발표… 주가 급락
지난 20일 장 마감 후 이차전지 장비 제조사 하나기술은 작년 6월 26일 맺은 1724억 원 규모의 수주 계약을 해지한다고 공시했다. 이 회사 연매출의 1.5배가 넘었던 금액의 공급 계약이 무산됐다는 것을 1년이 지나서야 공개한 것이다. 하나기술 주가는 다음 날부터 2거래일간 27% 하락했다.
작년 6월 계약 체결 공시 당시 하나기술은 계약 상대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계약 상대의 영업 비밀 보호 요청을 이유로 아시아 지역 이차전지 제조사라고만 기재했다. 증권가에선 계약 상대가 세계 전기차 배터리 점유율 1위인 중국 CATL로 추정된다는 추측이 퍼졌다. 한 증권사는 수주 금액과 공급 지역을 감안하면 중국 초대형 배터리 기업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의 기업 분석 보고서를 발간해 이런 추측에 힘을 실었다. 보고서엔 향후 기대되는 전체 수주는 조 단위를 충분히 넘어설 것이란 내용도 담겼다.
대형 수주 계약 공시에 하나기술 주가는 한 달 만에 7만원대에서 13만원대로 두 배가량 치솟았다. 주가가 오르자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해 시세 차익을 얻은 투자자도 급증했다. 하나기술 전환사채 보유자들은 작년 9월 초까지 13차례에 걸쳐 전환가액 5만6902원에 255억원 규모의 주식으로 바꿨다. 이후 주식을 팔아 많게는 두 배 이상의 차익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하나기술은 수주 금액을 한푼도 손에 쥐지 못했다. 발주처의 투자 유치 지연 등으로 계약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하나기술은 계약 해지 공시를 하면서 발주처의 영문명을 공개했는데, 구글에서 검색 결과도 나오지 않는 중국 회사로 드러났다. 계약 발표 후의 과정이 깜깜이로 진행되는 동안 매출이 늘어날 거라 믿고 기다렸던 주주 사이에선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이 나왔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 들어 이달 24일까지 코스닥시장에서 단일판매·공급계약 공시 후 불이행·번복·변경을 이유로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된 상장사는 10곳에 달했다. 이 기간 전체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건수 중 약 20%를 차지했다. 작년 한 해 같은 이유로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된 코스닥 상장사가 총 7곳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크게 늘어난 수치다.
◇ ‘비밀 유지’ 제도 허점 악용해 주가 띄우기 빈번… 제재 조치 미흡
공시 규정에 따르면 코스닥 상장사의 단일판매·공급계약 규모가 직전연도 매출액의 10% 이상이면(유가증권시장은 5%) 의무공시 대상이 된다. 공시 후 계약 금액이 변동되거나 해지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진단키트 공급 계약 공시가 급증했다가 유행이 사그라들면서 계약 해지가 잇따른 게 대표적이다.
한국거래소는 판매·공급 계약 공시 전 상장사로부터 계약서와 발주처 정보 등을 받아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 검토 단계에서 회사가 요청한 경영상 비밀 유지 필요성이 인정되면 지정된 공시 유보기한까지 거래 상대 등을 비공개하도록 허용한다. 문제는 규정상 단일판매·공급계약은 체결일 다음 날까지 공시해야 하기 때문에 거래소가 시간적으로 상세 내용을 모두 확인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서류상 문제가 없으면 그대로 공시가 이뤄지는 게 현실이다.
이런 제도적 허점을 노려 비공개 공시 관례를 주가 올리기에 악용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거래소는 공시 변경·철회 등의 경우에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해 벌점을 부과하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벌점을 제재금 납부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더 강력한 사후 제재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상호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판매·계약 공시 등을 철회할 경우, 내부정보를 활용한 선행매매 여부 등을 확인해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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