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화의 ‘영웅’·최정원의 ‘시카고’…장수 뮤지컬의 비결은?

백승찬 기자 2024. 6. 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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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카고>의 한 장면. 빌리(최재림·오른쪽)가 복화술로 록시(티파니 영)의 기자회견을 조종하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관객 기호는 급변한다. 지난해 구름 관객을 모았던 공연이 올해 고전할 수도 있다. 이런 환경에서 20년 안팎으로 무대에 오르는 공연의 비결은 무엇일까.

다양한 세대에게 인기 <영웅>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 에이콤 제공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00년 된 2009년 10월 26일 초연했다. 현재 15주년 기념으로 10번째 시즌이 공연하고 있다. 지난해 9번째 시즌에는 한국 창작 뮤지컬 사상 <명성황후>에 이어 두 번째로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안중근은 재판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15가지 이유를 드는데, 그 첫 번째가 “한국의 민황후(명성황후)를 시해한 죄”다. <명성황후>를 만든 윤호진 예술감독은 그 후속편 격으로 <영웅>을 제작해 전작보다 세련되고 균형감 있는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영웅>은 안중근이 독립군과 러시아 연해주에서 손가락을 잘라 독립운동을 결의하는 데서 시작해 이토를 사살하고 재판을 받아 사형당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번 시즌 개막일인 지난달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로비는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로 북적였다. 뮤지컬 주 관객층은 통상 20~30대 여성이지만, 이날은 중장년과 어린이·청소년 관객도 많았다. <영웅> 측은 “교육적 측면 때문에 초·중·고 단체 관람과 가족 단위 관객이 많다”고 전했다.

1막 일부 장면은 세월의 흔적인 듯 낡아 보이기도 하지만, 명성황후의 최후를 목격한 궁녀로 설정된 가상 인물 설희의 이토 암살 시도, 안중근의 거사, 재판과 사형 집행 장면이 이어지는 2막은 박진감이 있다. 설희와 이토가 함께 탄 기차 장면, 이토가 하얼빈 역에 내리는 장면에 사용된 시각효과는 15년 전 작품이라는 점이 무색하게 완성도 있다. 윤호진 감독은 “박동우 무대 디자이너와 함께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매직쇼처럼 만들어보려 했다”고 말했다. <영웅>을 보지 않은 관객도 들어봤을 법한 ‘누가 죄인인가’ ‘장부가’ 등 호소력 있는 넘버를 보유했다는 점도 <영웅>의 장점이다.

뮤지컬 <영웅> 중 ‘누가 죄인인가’ 대목.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일본 법정에 선 안중근은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이토가 죄인이라고 주장한다. 에이콤 제공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 역의 정성화가 극의 하이라이트인 ‘장부가’를 부르고 있다. 정성화는 죽음을 눈 앞에 둔 안중근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에이콤 제공

초연을 포함해 8번의 시즌에서 안중근 역을 맡은 정성화의 존재감도 크다. 정성화는 초연 당시만 해도 뮤지컬계 ‘라이징 스타’에 가까웠으나, <영웅> 이후 명실상부한 주연급 배우로 자리 잡았다. 정성화가 더 뮤지컬 어워즈, 한국뮤지컬대상 등에서 처음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도 <영웅>을 통해서였다. 정성화는 2022년 개봉한 윤제균 감독의 영화 <영웅>에서도 안중근으로 등장했다. 정성화는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다가 이를 이겨내는 안중근의 인간적인 면모를 잘 살려내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시대 흐름에 따른 변화도 있다. 초연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의 노래 하나가 삭제됐다. 윤호진 감독은 “안중근이 주인공, 이토가 안타고니스트인데, 둘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춰야 했다. 자칫 잘못하면 일본을 미화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고 말했다. 이토 노래의 삭제 역시 미화가 아니냐는 여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시즌엔 원로 배우 박정자가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역으로 처음 캐스팅됐다. 박정자는 프레스콜에서 “15년 동안 <영웅>을 기다렸다”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인 배우가 맡아오던 간수 치바 역은 이번에 처음으로 일본인 배우 노지마 나오토가 캐스팅됐다. 그는 영화 <영웅>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다. 치바는 안중근의 최후를 목격하며 그에게 감화받는 인물이다. <영웅>은 8월 11일까지 공연한다.

매력 있는 악당들이 풍자하는 세상 <시카고>
뮤지컬 <시카고>에서 벨마 역을 연기하는 최정원(가운데). 그는 2000년 <시카고> 초연부터 모든 시즌에 참여했다. 신시컴퍼니 제공

7일 서울 디큐브 링크아트센터에서 17번째 시즌이 개막한 뮤지컬 <시카고>는 <영웅>으로부터 불과 10년 뒤인 1920년대가 배경이다. 당시 한국과 미국의 상황이 그러하듯, 두 뮤지컬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다.

<시카고>는 남편과 여동생을 죽인 죄로 수감 중인 여성 벨마가 사회자처럼 등장해 살인, 부패, 폭력, 간통에 얽힌 선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조다. 한국 관객이 좋아할 법한 기승전결 구조나 권선징악의 서사를 따르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악하고 간혹 멍청하다. 관객이 감정 이입하거나 정 붙일 인물이 없다. 무대가 회전하거나 갑자기 바뀌며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하지도 않는다. 무대 위에는 빅밴드가 계단형으로 드러나게 자리했고, 이들 주변에서 배우들이 움직이며 춤 추고 노래 하는 단순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흥행 요소가 거의 없어 보이는 뮤지컬이지만, <시카고>는 2000년 한국 초연 이후 누적 관객 154만 명을 동원한 스테디셀러로 자리했다. 우선 뮤지컬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음악과 춤의 힘이 크다. 전설적인 뮤지컬 안무가·연출가 밥 파시가 만든 춤은 빅밴드의 재즈 음악과 결합해 강력한 효과를 낸다. 극의 어두운 분위기와 상반되는 경쾌한 음악과 동작이 서로를 되먹여 증폭시킨다. 배우들은 근육질 몸매가 거의 드러나는 시스루 의상을 입는다. 이 때문에 춤 동작이 더욱 두드러진다. 선정성에 대한 우려 때문에 관람연령은 ‘중학생 이상 관람가’면서도 ‘고등학생 이상 권장’이라고 명시됐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이야기지만, 작품이 풍자하는 현실은 오늘날에 더욱 설득력 있다. <시카고>에서 사건은 더욱 선정적인 사건으로 묻힌다. 오명이든 악명이든 유명세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시카고>는 ‘1전 신문’(penny paper)이라 불리던 선정적 저널리즘을 풍자하는데, 이는 현대 온라인의 수많은 ‘사이버 렉카’와 겹친다.

뮤지컬 <시카고>에서 록시 역을 연기하고 있는 아이비(가운데). 신시컴퍼니 제공

벨마가 등장해 극의 분위기를 잡는 ‘올 댓 재즈’는 <시카고>에서 가장 유명한 넘버다. 한국에선 악덕 변호사 빌리가 부르는 ‘위 보스 리치드 포 더 건’(We both reached for the gun)도 인기다. 빌리가 자신이 변호하는 살인자 록시에게 동정 여론을 유발하기 위해 거짓으로 점철된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이다. 빌리 역의 배우는 복화술로 록시의 말을 대신한다. 2021년 처음 빌리 역을 맡은 최재림의 복화술 장면이 온라인에서 크게 인기를 끌면서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이번 <시카고>를 기다렸다는 관객도 많다.

<영웅>에 정성화가 있다면 <시카고>에는 최정원이 있다. 최정원은 초연부터 모든 시즌에 출연했다. 처음에는 록시 역이었다가 2007년부터 벨마 역을 연기했다. 최정원은 기자간담회에서 “24년째 <시카고>와 함께 하고 있는데 다시 태어나도 함께 하고 싶다”며 “춤과 노래와 술, 모든 것이 다 있는 <시카고>는 마당놀이 같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공연 기간이 오래된 만큼 최정원을 제외한 배우들은 조금씩 젊은 피로 바뀌었다. 특히 2021년 시즌에 새 배우가 많이 들어왔다. 이때 티파니 영과 민경아가 록시, 최재림과 박건형이 빌리 역에 처음 캐스팅됐다. 이들은 이번 시즌에도 나온다. <시카고>는 9월 29일까지 공연한다.

백승찬 선임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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