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 전시장에 자살공격대 ‘가미카제’ 광풍이 분다

노형석 기자 2024. 6. 25. 13: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호추니엔 작가의 ‘시간과 구름’ 전 눈길
일본 제국주의 망령 옛 필름서 탐색
2층 다다미방 한쪽 전시실에서는 거장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초창기 영화와 유명 만화가 요코야마 류이치의 전쟁선전용 만화영화가 각기 다른 스크린에서 영상이 겹쳐진 채 상영되는 기묘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오즈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1932년작 무성영화 ‘태어나기는 했지만’에 등장하는 아이들과 류이치의 선전만화영화 ‘잠수함의 후쿠짱’의 앳된 승조원 모습이 겹쳐진 채 상영되는 장면. 한결같이 얼굴에서 눈코입의 표정이 지워져 있어 섬뜩하고 기괴한 느낌을 안긴다. 노형석 기자

서울 북촌 큰 미술관에 지금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들이 떠돌며 진동한다.

일제 자살공격대 가미카제의 광풍이 격렬한 진동과 함께 전시장 다다미방에 불어온다. 귀여운 몸매를 한 어린 해군병사가 육상의 적 진지와 해상의 미군 항모를 향해 천진난만한 몸짓으로 집중포격하는 만화영화가 그 사이 돌아간다. 천황과 국가를 위해 기꺼이 죽으라는 군국주의 일본의 대동아전쟁을 추억하는 전우들은 20여년 뒤 세계적인 거장이 된 일본 영화감독의 작품 속에서 ‘군함행진곡’을 읊조리며 거수경례를 한다. 가미카제 자살특공에 아들들을 잃은 부모들은 자살특공대원들이 마지막 연회를 했던 료칸(여관)에 모여 그들의 군가 ‘동기의 사쿠라’를 부른다. 배우 아닌 배우가 된 그들은 한결같이 얼굴이 없다!

이달 4일부터 서울 소격동 아트선재센터에서 국내 첫 개인전 ‘시간과 구름’을 열고있는 싱가포르 작가 호추니엔의 역사적 미디어아트 근작들은 초여름 서울의 미술판에서 최고 화제작으로 떠오르는 중이다. 아시아인 시각 속에 남은 일본 제국주의 사상과 인식의 잔재를 추적하는 이번 전시에서 ‘아포리아’는 가장 돋보이는 하이라이트다. 아포리아는 여러 쟁점과 다른 맥락의 사실들이 중첩돼 실체를 가리기가 쉽지 않은 난제를 일컫는 말.

3층 들머리에 나온 호 추 니엔의 시간 이미지 영상물들. 오른쪽이 ‘모터사이클 공허’란 제목의 영상물이고 왼쪽 위에 있는 두개의 벽시계는 시간이 갈수록 어긋나는 숙명을 지닌 거장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설치물 ‘완벽한 연인’을 영상에 담은 작품이다. ‘…공허’에서는 사이클 라이더의 얼굴 부위가 작은 스크린이 되어 그 위로 도시가로를 질주하는 영상이 흘러간다. 호 추 니엔은 이 작품을 두고 말한다. “당신의 몸은 언제나 현재에서, 즉 과거와 미래의 경계선에서 움직인다. 당신의 정신은 더 자유롭다. 정신은 현재에 있지만, 사유한다. 무언가 기억하면, 그 순간 과거로 이동한다. 무언가 상상하면, 그 순간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미래들로 이동한다.” 노형석 기자

일본식 다다미방의 규격과 기본 얼개를 갖춘 4개의 전시실에서 2차 세계대전 전후 일본 예술가들이 만든 영상이 상영되는데 영상 사이에 안쪽에 자리한 강력한 팬 프로펠러의 굉음과 바람이 몰아쳤다가 그쳤다가 한다. 상영되는 영상은 2차대전 당시 선전 영화 제작 등을 위해 징집됐으나 별다른 작품을 남기지 않은 유명 영화감독 오즈 야스지로가 1949년에 만든 ‘만춘'과 1960년작 ‘가을햇살’의 주요 필름 장면 그리고 ‘후쿠짱’ 만화로 유명한 요코야마 류이치가 1944년 만든 일본 잠수함대의 선전 만화 영화 등의 일부 장면들을 간추린 푸티지 편집본 영상이다.

싱가포르 국적의 호 추 니엔은 말레이계 출신의 아티스트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를 점령했던 일본 제국주의에서 작업의 실마리를 잡고, 아시아인에게 현재도 영향을 미치는 유령 같은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바탕인 근대초극론, 대동아공영권의 잔영을 일본 지배지역에 파견됐던 예술가들의 선전 작품과 전후 회고적 작품을 통해 돌아본다.

무엇보다도 식민지시기 동아시아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강박적으로 뿌리내렸던 70여년전 일본 제국주의 사상 기저의 맥락을 생생한 공감각적 이미지로 연출한 것이 새롭다.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2층 공간의 핵심 설치작품이 안쪽 다다미 전시장 안쪽에 놓인 큰 프로펠러 달린 팬이다. 팬은 배후의 강렬한 불빛을 받으면서 바람을 일으키고 진동을 거듭한다. 2019년 아이치 트리엔날레에 이 작품을 처음 출품했을 당시 준비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근저를 이루는 이 근대초극론 사상에 대해 작가 호 추 니엔과 일본 기획자 사이에 오간 이메일 대화 내용이 팬 아래 자막에 깔린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는 선불교의 일체유심조 설법과 만물은 모두 비어있다는 공 사상을 서구에 대척하는 일제의 아시아 지배사상(대동아공영권)으로 다듬어낸 교토 학파 태두 니시다 기타로의 근대초극론 요체가 팬을 움직이는 동력이 되는 셈이다. 이런 제국주의 사상의 힘으로 가동되는 팬의 바람과 진동, 자막에 깔리는 근대초극론 담론들을 읽으면서 일제 침략전쟁의 사상적 면모를 시각과 촉감으로 감지하게 된다.

얼굴을 모두 지워버린 영상 속 인물들은 과거의 사건과 흔적들이 지금도 우리 모두에게 재생될 수 있다는 일종의 상징적인 표상으로 작동하게 된다고 작가와 기획자는 설명한다.

2층 ‘호텔 아포리아’에서 핵심 전시물중 하나인 거대한 팬이 배후의 불빛을 받으며 돌아가는 모습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 근저를 이루는 교토학파의 근대초극론 사상에 대한 작가 호 추 니엔과 일본 기획자 요코 사이의 이메일 대화가 그 아래 자막으로 깔린다. 팬의 프로펠러가 일으키는 바람과 진동, 자막에 깔리는 근대초극론에 대한 대화를 읽으면서 관객은 일본 제국주의 사상의 면모를 어렴풋이 시각과 촉감으로 감지하게 된다. 노형석 기자

3층의 감상체험도 흥미진진하다. 일제 강점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지금과 미래의 시간성을 성찰한 영상 설치 신작 ‘시간(타임)의 티’(T for Time)와 시간의 조각들인 ‘타임피스’(Timepieces)라고 명명된 42개의 영상이 등장한다. 시간과 관련된 이미지와 파편화한 시간의 담론, 경구 등에 대한 내러티브들이 순환하면서 이어진다.

과거에 해소되지 않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작품의 이미지로 직면하지 않으면 다양한 형태로 현재에 돌아와 우리를 억누르게 된다는 작가의 발상을 주목할 만하다. 8월4일까지. 입장료 1만원.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