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는 위작자인가
(시사저널=조명계 미술시장 분석 전문가(전 소더비 아시아 부사장))
이탈리아 조각가 미켈란젤로(1475~1564)가 고대 큐피드 조각상을 만들고, 산성 토양에 파묻어 연대를 알 수 없게 속인 후 추기경에게 팔았다는 이야기를 많은 이가 정설처럼 퍼나르고 있다.
미켈란젤로가 《잠자는 큐피드》를 제작한 것은 맞다. 하지만 고증할 문서가 없는 중세 때 이야기를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 고민된다. 최초의 서양미술사 책으로 여겨지는, 미켈란젤로와 동시대를 살았던 조르조 바사리의 《예술가의 생애(Lives of the Artists)》에서도 미켈란젤로가 위작를 했다고 쓰여 있지는 않다.
필자는 지난 기고를 통해 "라오콘 군상이 미켈란젤로의 위작일 수도 있다"는 추측을 했지만, 이마저도 입증된 바는 없다. 미켈란젤로가 실제로 《잠자는 큐피드》 작품을 제작했음은 확인된다. 다만 미켈란젤로의 원래 의도는 뛰어난 큐피드상을 만들고자 했는데, 어찌어찌하다가 위작이 돼버렸다는 점이다.
메디치 가문과의 인연, 《잠자는 큐피드》
미켈란젤로의 10대 시절은 여느 청년과 다름없었다. 1496년, 빈 지갑을 만지작거리며 고군분투하는 젊은 예술가에 불과했다. 그래도 행운이랄까.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 아래 존경받는 조각가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로렌초가 죽고, 아들 피에로는 미켈란젤로를 눈여겨보지 않았으므로 그는 메디치가를 떠났다.
21세가 된 미켈란젤로는 재능과 열정은 있었지만, 어렸고, 인지도가 전혀 없었다. 시류 하나만은 제대로 읽었다. 당시 수집가들은 당대 미술작품보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시대 것으로 보이는 고전 조각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모든 예술가가 이 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미켈란젤로도 그 대열에 섰다.
미켈란젤로는 1495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피렌체에 도착한 직후부터 큐피드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가 큐피드를 제작하게 된 배경은 큐피드가 놓여 있던 메디치가 정원에서 조각을 공부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가 큐피드를 처음 본 때는 12세 즈음이었다. 스무 살이 넘자 자신만의 큐피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조각상이 팔리는 과정에 대해서는 바사리의 글에 기초한다. 바사리는 미켈란젤로가 조각을 했지만, 이 조각을 산성의 포도밭 흙에 묻어 인위적으로 나이(?)를 먹게 한 후 그 가치를 높여 고대 유물처럼 보이도록 한 것은 미술품 딜러인 '발데사레 델 밀라네세'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발데사레가 덜 유명한 예술가의 당대 조각품을 고대 조각품으로 탈바꿈시켜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조작했다는 것이다. 《잠자는 큐피드》를 누가 파묻었든 간에 인위적으로 숙성한 후 '라파엘로 리아리오' 추기경(1512~1514 재임)에게 팔았다. 추기경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위작에 자신이 속은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미켈란젤로 위작에 속아 넘어간 추기경
미켈란젤로는 발데사레가 추기경에게 조각상을 팔아 얼마를 벌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로마로 가서 조각상의 반환을 요구했다. 이에 발데사레는 "차라리 100조각으로 쪼개 부숴버리겠다"며 자신이 산 것이니 자신의 소유라고 했다.
위작에 속은 추기경은 환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추기경은 왜 미켈란젤로를 비난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개인의 천재성과 재능의 신성함이라는 개념은 르네상스 시대 들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전까지 아티스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장인정신'이 훨씬 더 강했다. 따라서 어느 정도까지는 모방이 가장 진실한 형태의 예술성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리아리오 추기경은 이 젊은 예술가의 독창성과 타고난 재능에 감명받아 고소하지 않고 판매 대금을 가져가도록 허락하고, 오히려 로마로 초대해 1년간 작업했다"고 바사리는 쓰고 있다.
이 위작 사건은 미켈란젤로의 커리어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리아리오 추기경은 오히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를 만들어줄 것을 주문했다. 미켈란젤로에게는 더 큰 기회가 주어졌고, 로마에서 바티칸의 성모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피에타》 등 그의 생애 3대 작품을 작업하게 된 것이다.
《잠자는 큐피드》는 세사레 보르지아가 발데사레로부터 구입했고, 얼마 후 보르지아는 우르비노 공작 귀도발도 다 몬테펠트레에게 기증했다. 그 후 1632년 찰스 1세를 위해 영국으로 보내질 때까지 100년 넘게 만토바 공작의 궁정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조각상은 1698년 런던의 화이트홀 궁전 화재로 다른 많은 조각품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미켈란젤로는 기술과 재능, 특히 고대 그리스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하는 데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므로 그의 예술은 서양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남을 수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말을 인용해 본다. "내가 숙달되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야 했는지 사람들이 안다면 그렇게 대단해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24세의 나이에 명성을 얻게 되고, 가장 훌륭한 예술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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