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의 시간’ 견뎌내고 인권운동에 들어서다

한겨레 2024. 6. 2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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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박래군의 인권의 꿈]
8화 상실의 고통과 운명적 순간
마석모란공원 박래전 묘지. 왼쪽 추모비엔 박래전이 쓴 시 ‘동화’의 후반부가 신영복 선생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필자 제공

동생 장례를 마치고 나니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술만 드시면 “래전이 불쌍해서 어떡해” 하며 우는 아버지, 내놓고 울지도 못하고 눈물만 흘리는 어머니가 계셨다. 사람들은 그랬다. “막내 잃은 부모님을 네가 잘 보살펴야 한다”고. ‘너 때문에 래전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직접 대놓고 하는 친척도 있었고,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도 들렸다. 화도 나고 억울했다. 그때 내가 래전이의 마지막 전화를 받았다면 분신을 말릴 수 있었을까? 래전이 얼굴에 검은 반점이 피어날 때 돈 몇 푼 던져주고 말 게 아니라 직접 병원을 갔더라면 달랐을까? 뭐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신은 나와 상관없는 일인 줄 알았다. 막상 내가 당해 보니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

사실 나는 래전이의 앞길을 방해해왔다. 군대 제대하고 복학해서 운동을 다시 시작한 1986년, 내가 노동운동을 하다 감옥에 가는 탓에 래전이는 부모님 손에 이끌려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래전이는 복학 뒤 학생운동을 제대로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 걱정에 무척 괴로워했다. 유서에도 “올해로써 대학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 분을 모시면서 고향에서 올바른 뜻을 펴고자 했습니다”라고 썼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분신을 했을까? 혼자 있는 시간이면, 이런저런 생각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장례 기간에는 생각도 못했는데, 모든 공간에 래전이가 있었다. 래전이 동료들의 충격도 무척이나 컸다. 그 후배들과 만나 래전이 얘기를 들었다. 그들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며 자책하고 울었다. 숭실대학교와 인근에서 그리고 시골집을 찾아온 그들 등을 다독였다.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후배들은 래전이가 5월 투쟁에 나서서 단식을 하고, 혈서를 쓰고, 거리 투쟁을 할 때 온힘으로 함께하지 못했던 일들을 후회했다. ‘형이 너무 과격하다, 조급하다’고 비판했던 몇몇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한동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이 두려웠다. 그래서 더 래전이의 숭실대 후배들과 어울렸던 것 같다. 혼자 있으면 지나간 모든 일이 후회로 돌아왔다. 조성만(서울대생으로 1988년 5월15일 명동성당 가톨릭회관에서 할복 후 투신 자결), 최덕수(단국대 천안캠퍼스에서 1988년 5·18광주민중항쟁 기념일에 분신 자결)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던 것도 회한으로 남았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최덕수의 아버지와 백기완 선생님은 그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래전이가 덕수 장례식에서 누구보다 슬픈 표정으로 마지막 날까지 함께 했던 모습을 말이다.

돌아보면 동생은 보이지 않고

거리에 나서면 “형”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한번은 내 앞에 마르고 키가 껑충하게 큰 청년이 가는 걸 보고는 급히 달려가 팔을 잡으며 “래전아!” 하고 불렀다. 동생이 아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자꾸 헛것이 보이고 환청이 들렸다.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숯덩이가 되어 죽었는데, 마지막에는 밥 한 끼 먹이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했는데. 배가 고파 밥을 먹어도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가슴이 조여 오면서 숨 막히는 고통이 몰려오고는 했다. 지금에야 트라우마니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이니 하지만, 그때는 그런 걸 몰랐을 뿐더러 알려주는 이도 없었다. 나의 슬픔과 분노는 감추어야 하는 것이었고, 말해야 하는 게 아니었다.

장례 기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부재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외로웠다. 사람들 속에 있어도 내 마음 속 얘기를 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슬퍼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안아주어야 했다. 나는 ‘울어서는 안 된다, 부모님, 후배들도 내가 챙겨야 하는데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갑자기 울컥했고, 그리움이 밀려오곤 했다. 아버지는 술과 농사일로 자신을 몰아세웠다. 상념에 젖어들까 더욱더 일을 벌이고 집착했다. 점차 래전이에 관한 이야기는 집안의 금기가 됐다.

박래전 유고시집. 필자 제공

동생은 시인이었다. 세계출판사 윤후덕 선배가 시집을 내자고 했다. 래전이가 쓴 시들을 찾아서 정리했다. 52편의 시편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직도 시만 쓰고 앉아있어야 하는가?/ 아직도 헛소리나 지껄이는 우리이어야 하는가?/ 뜨거운 가슴 감추어 두고/ 핏발 선 눈빛도 가리워두고/ 종잇장이나 메우면서 이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시인에게-모독∙1’ 중에서) 자책을 하면서도 그는 꾸준히 시를 썼다. 가까운 후배들에게는 읽어보라며 보여주기도 했다. 래전이는 숭실대 국문과생이자 다형문학회 회원이었다. 시집에는 래전이가 남긴 52편의 시를 4부로 나눠 수록하고, 5부에는 래전이가 참여했던 다형문학회 집단창작시를 실었다. 부록으로 래전이의 유서 3통을 실었고, 발문을 대신한 나의 글은 학교 동기인 심산(본명은 심종철)이 많이 고쳐주었다. 서문은 백기완 선생님이 써 주셨다. 그렇게 해서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 참인간이고자 했던 작은 사람의 아들” 박래전의 유고시집이 49재에 맞춰 ‘반도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어떡할려고 그러니 이노무 새끼들아/ 난 어떡하라고 두 형제가 다 유치장에 있어/ 나와라/ 나와서 이야기 좀 하자/ 어떡하란 말이냐 얘들아// 노량진 유치장에 면회 오신 어머님/ 나이 오십에/ 칠십 나이 겉늙은/ 할머니 주름 가득한/ 어머님 (‘어머니 말씀’ 전문)

‘반도의 노래’ 육필 원고. 필자 제공

시인 박래전이 남긴 유고시들

백기완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몇 년 전, 래전의 시집을 읽다가 내 생각이 났다며 어느 날 전화를 걸어오셨다. 백 선생님은 전화로 저 시를 낭송하며 소리 내 우셨다. 1986년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동생은 시골에 있다가 잠시 학교에 다니러 왔었다. 그러다가 시위현장에 화염병을 운반하던 중 경찰에 잡혀서 노량진경찰서에서 15일간 구류를 살았다. 하필이면 그때가 추석 때였다.

래전이는 시만 쓰지 않았고, 자신이 배우고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사람이었다. 심성은 여렸지만 불의 앞에는 유난히 고집이 셌다. 그가 남긴 시 곳곳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어서라도 시대의 아픔을 넘으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너희들이 원한다면/ 내게 불을 붙여다오/ 조각나고 야위었을지라도/ 마른 장작이 더 잘 타는 것/ 내 배를 탄 백성들이 원한다면/ 자! 불을 붙여다오(‘반도의 노래’ 중에서)

대표작은 ‘동화’(冬花)다. 동화는 겨울꽃인데 자신의 필명으로도 썼다. 다음은 이 시의 후반부다.

겨울꽃이 되어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이름은 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지금은 겨울, “내 발의 사슬 때문”에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지독한 겨울에 온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겨울꽃, 바로 자신이었다. 죽음을 결심한 자의 시였다. 이 시의 후반부를 학교 추모비 뒷면에, 모란공원 묘지 앞 비석에 새겼다.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로.

신영복 선생이 쓴 박래전의 시 ‘동화’. 필자 제공

방황하는 나에게 이소선 어머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유가협(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 현재의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월례모임을 하는데 나와 보라고 하셨다. 1988년 8월12일, 처음으로 유가협 모임에 나갔다. 청계노조 사무실로 기억나는데, 유가족들이 모여서 총회를 하는 자리였다. 회의가 제대로 되질 않았다. 도떼기시장이라고나 해야 할까? 아버지들이 화를 내듯 큰 목소리로 자기 얘기만 늘어 놓는 중에도 이소선 어머니는 회의를 진행해갔다.

어머니들은 래전이의 형이 왔다며 반겨주셨다. 그렇게 유가협에 한 발을 들여놓았다. 살다보면 찾아오는 한 순간이 있다. 아마도 운명적인, 피할 수 없는 순간. 그때가 그런 순간이었음을 나는 몰랐다. 운명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를 인권운동의 길로 이끌었다.

숭실대 인문대학생회장 시절 시위를 이끌고 있는 박래전. 필자 제공

박래군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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