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이 보여준 ‘제재의 역설’…새로운 유라시아 동맹 가속화
미국 등 서방, 전례없는 중·러 제재
북·베트남·이란과 새 안보구조 모색
미국이 주도하는 ‘규칙 기반의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도전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다극화 체제’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동아시아 순방으로 더욱 빨라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지난 19~20일 북한 및 베트남 방문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황이 러시아에 유리하게 흐르고, 가자전쟁 관련해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뤄졌다. 유라시아 서쪽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전쟁이 서방에 전략적 타격을 입혔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푸틴 대통령은 유라시아 동쪽에서 전략적 함의가 있는 북한과 베트남을 방문했다. 2022년 2월 말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 뒤 서방의 고강도 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가 고립되기는커녕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가면서 외교적 영향력도 확장하는 모양새이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19일 방북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어느 한쪽이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면 유엔헌장 제51조와 양국 법에 준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한다’(제4조)는 내용이 들어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맺었다. ‘한쪽이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 상태에 처하면 지체 없이 군사적 원조를 제공한다’는 1961년 북-소 동맹 조약보다는 강도가 약하지만 군사동맹에 준하는 방위조약을 복원시켰다는 평가가 나온다. 20일 베트남 방문 때도 2012년 양국이 맺은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확인하며, 베트남에 원자력 과학기술 센터 설립을 지원하기로 합의하는 등 양국 관계를 실질적으로 격상시켰다. 푸틴 대통령은 미국의 제재로 출구가 막힌 러시아의 원자재 및 군사과학 기술을 미국 주도 질서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들에 제공해 이들을 규합하려는 전략을 사용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이 이번 북한·베트남 방문 때 방문국의 관영 언론에 한 기고를 보면 “새로운 유라시아 안보 구조” 및 “서방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역) 결제체제”를 강조하고 있다. 러시아뿐 아니라 중국도 다극화 질서의 핵심으로 설정하는 과제들이다.
푸틴 대통령은 북한 노동신문 기고문에 “서방의 통제를 받지 않는 무역 및 호상(상호) 결제체계를 발전시키겠다” “유라시아에서 평등하고 불가분리적인 안전(안보) 구조를 건설해 나가겠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베트남 공산당 관영지 ‘년전’에 “베트남을 포용적이고 비차별적인 기초 위에서 공평하고 분리불가한 유라시아 안보의 새로운 설계를 형성하는 데 같은 생각의 동반자로 본다”며 “ (달러가 아닌) 러시아 루블과 베트남 동으로 결제를 실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던 19일에 러시아는 이란과도 국가안보위원회의 최고실무자 회의를 갖고 안보협의를 했다. 러시아 안보위원회의 알렉산드르 베네딕토프 부서기와 이란 최고국가안보위의 모하마드 모하마디 알라무티 부서기가 테헤란에서 양국의 관련 부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양국 안보 분야 협력 세부 사항 등을 협의했다고 러시아 타스 통신이 보도했다.
양국 안보위원회의 최고 실무책임자 회의는 양국 사이의 안보 문제가 이제 논의가 아니라 실행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의미이다. 양국의 안보 협력은 러시아의 타타르스탄 지역에 이란이 설계한 자폭 드론 샤헤드-136을 매년 수천대 생산하는 공장을 건설하는 등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속도로 진척됐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미국 당국자들을 인용해 최근 보도했다.
신문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가 이란·북한·중국과의 군사협력으로 전쟁물자 생산 능력을 재건하는 한편 이들 국가의 군수물자 생산 능력도 급속도로 향상되고 있다고 미국 관리들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국가 사이의 “안보관계 확대의 속도와 깊이는 미국 정보분석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상황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전 미국 안보보좌관이 저서 ‘거대한 체스판’에서 냉전 이후 미국의 세계 패권 관련해 가장 우려해야 할 상황으로 강조했던 반미적인 중-러-이란 연대라는 ‘유라시아 동맹’이다. 푸틴 대통령이 이번 동아시아 순방에서 강조했던 “분리불가한 새로운 유라시아 안보 구조”는 바로 이를 지칭한다.
‘유라시아 안보 구조’의 동력은 중국이다. 미국의 디커플링(공급망 분리)에 봉착한 중국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의 적들인 러시아·이란·북한뿐 아니라,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은 인도·브라질·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주요 신흥국들과 함께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경제 및 교역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의 제재를 받아 판로가 막힌 러시아·이란·베네수엘라의 석유 등 원자재를 구매하고, 이들 국가는 중국에서 각종 상품을 구매하는 윈-윈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인도·브라질·남아공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멕시코 등도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등거리 외교로 줄타기하고 있다.
중국 세관당국인 해관총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중-러 무역액은 전년도에 견줘 26% 이상 늘어난 2401억달러(약 333조5230억원)에 이르렀다. 이 중 위안-루블화 결제 비중은 90% 이상이라고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밝힌 바 있다. 중·러 양국 통화 결제는 미국의 제재에 따른 고육지책이나, 제조업의 세계 공장이 된 중국과 원자재 및 최고 수준의 과학·군사 기술을 가진 러시아가 독자적인 윈-윈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증표이다. 지난해 4월 중국과 브라질은 정상회의에서 양국 교역에서 달러를 배제하고 양국 통화로 거래한다는 데 합의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과의 석유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를 일부 도입한 사우디는 지난 5일 중국이 주도하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국경 간 거래인 ‘프로젝트 엠브리지’에 참가한다고 발표했다. 국제결제은행이 감독하고 135개국이 참가한 이 프로젝트에서 사우디의 참가는 “달러 체제 밖에서 원자재 결제 확대를 몇년 안에 보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고 미국의 애틀랜틱카운슬은 평가했다.
국제통화기금 통계에 따르면, 달러가 각국의 외환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70%에서 지난해 하반기 55%로 떨어졌다. 디커플링 압박에 직면한 중국이 러시아 등과의 교역에서 달러 비중을 급격히 축소했고, 러시아를 포함한 상대국 역시 발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중·러가 주요 7개국(G7)에 맞서려고 주도하는 브릭스는 올해 아랍에미리트 등을 새 회원국으로 받아들여 몸집을 두 배 가까이 키웠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주요 7개국이 45조9천억달러로, 브릭스 30조8천억달러보다 여전히 15조달러 이상이 많다. 하지만 구매력평가지수를 기반으로 계산한 브릭스 회원국들 국내총생산 합계는 2022년 31.5%로 주요 7개국(30.3%)을 추월했다. 경제협력체 성격이 강한 브릭스를 경제뿐 아니라 가치 및 군사적 협의체 성격이 있는 주요 7개국과 단순 비교할 수 없지만, 브릭스의 성장이 중·러에 다극화 공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3개월 전인 2021년 11월 화상 정상회담에서 다극화 질서 및 이를 위해 “제3자(미국)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금융 네트워크를 만들려는 노력을 가속화하겠다”고 천명했다. 이후 미국 등 서방은 중·러를 옥죄려는 전례 없는 대러 제재 및 중국에 대한 디커플링을 가했으나, ‘제재의 역설’을 낳고 있다. 제재를 받는 쪽이 대안을 찾고, 제재를 가하는 쪽이 손해를 보는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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