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귀의 詩와 視線] 숲에서 보낸 한나절
전체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보기를 권장합니다.
꽃들이 자라는 소릴 듣습니다.
숲에서 나무들 말하는 소릴 듣습니다.
자작나무가 곧게 서 있는 숲에서 한나절 바람 소리를 들었다.
숲에 앉아 새들 지저귀는 소리,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내 주위의 이 향기가 뭐지요?
이 고요는 뭐지요?
내 마음이 알게 된 이 평화는요?
이 크고 이상하고 새로운 감정은요?
꽃들이 자라는 소릴 듣습니다.
숲에서 나무들 말하는 소릴 듣습니다.
내 오랜 꿈들이 무르익는 것 같아요.
내가 뿌린 희망과 다른 바램들도요.
주위 모든 것이 고요해요.
모든 것이 부드럽고 향기로워요.
커다란 꽃들이 내 마음 안에서 피어나
깊은 평화의 향이 퍼지네요.
―에이노 레이노 시 ‘평화’
먼 도시에 다녀왔다. 핀란드 요안수. 헬싱키에서 북동부로 한참 올라가야 한다. 도착하는 날 레이더 교란으로 비행기가 착륙을 못 하고 다시 헬싱키로 돌아갔는데, 알고 보니 러시아와 차로 한 시간 거리다. 가 보니 평화롭고 여유롭고 예쁜 도시다. 백야로 밤에도 어둠이 내리지 않고 낮의 햇살은 투명하고 바람은 상쾌하다.
새로운 곳에는 새로운 만남이 있다. 코로나 이후 다시 만난 학자들도 반갑지만 이번의 새로운 만남은 숲이었다. 어디 먼 데 숲이 있는 게 아니라 동네 언저리마다 숲으로 가는 산책로가 있었다. 자작나무가 곧게 서 있는 숲에서 한나절 바람 소리를 들었다. 싱그러운 숲의 향기와 깨끗한 공기에 잔기침이 다 나았다. 천국 같았다. 핀란드 시인 에이노 레이노는 바로 그 숲이 주는 평화를 노래한다. 숲에 앉아 새들 지저귀는 소리,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초록을 뚫고 내려오는 햇살을 받아 본다. 숲의 향기, 숲의 평화 속에서 내 낡은 꿈들, 오래 버려 둔 꿈들이 다시 익어 간다. 내가 뿌린 희망들도 다시 자란다.
숲이 주는 이런 평화는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감각이다. 나무 그늘 아래 고요하게 있어 보아야 실감할 수 있는 감각이다. 도심의 소요 속에서, 좁은 사무실 서류 더미 속에서, 예민하고 날 선 갈등의 말들 속에서 온통 들끓던 마음이 숲을 거닐다 보면 차분히 가라앉는다. 깊은 평화의 향이 퍼져 나간다. 그래서 이 감각은 크고 이상하고 새롭다. 핀란드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 ‘카모메 식당’에 이런 대사가 있다. “여기 사람들은 왜 이리 여유로워 보일까요?” 이방인이 던진 질문에 청년이 무심히 답한다. “숲, 숲이 있어서요.”
그 숲을 생각하니 ‘숲가꾸기’라는 이름으로 싹쓸이 벌목을 하는 우리네 풍토가 더 안타깝고 아프다. 핀란드에선 위대한 시인이 태어난 날을 국기를 달며 기념한다. 공휴일로 정하진 않더라도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정성으로 기리는 나라. 우리도 우리 시인들 생일을 기려 국기를 달면 어떨까? 지나는 6월. 더구나 오늘은 이 땅에서 전쟁의 비극이 시작된 날이다. 그 비극 속에 사라진 정지용 시인의 생일이 6월 20일이다. 그래서 나는 내 마음의 국기를 단다. 시인을 위해, 시인이 새긴 아름다운 우리말을 위해, 우리가 잃어버린 애틋한 풍경을 위해. 우리가 일구어야 할 평화를 위해. 올여름 우리의 숲에서 우리의 꿈이 자라는 소릴 듣고 싶다.
정은귀 한국외대 영문학과 교수
Copyright © 서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개XX 니넨 돈 없어 나 못 친다”…김호중, 몸싸움 과거 영상 파문
- 이효리, 父 트라우마에 눈물 뚝뚝…母 “이제 용서해”
- ‘다 벗은 女’ 선거 포스터에 발칵 뒤집힌 日…“안이했다” 사과
- 이상민, 턱살 고민에 결국 성형…수술한 의사 정체 보니 ‘깜짝’
- 고교 철문에 깔려 숨진 경비원…“주민이 잠긴 문 세게 흔들어”
- “남친에게 복수”…中대학에서 나체로 질주한 40대 여성
- “나 뭐 잘못했어?”…기성용 SNS에 아내 한혜진 댓글, 무슨 일?
- “진짜 아니에요”…‘초등생과 성관계’ 20대男 법정서 쓰러져
- 자유로 갓길서 성추행당한 女 구해준 남성…정체는 ‘유명 연예인’
- ‘캐리비안의 해적’ 출연한 배우, 상어 공격으로 숨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