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교수 마다하고 30대에 들어왔는데, 연구비 0원"... 성장 체계 흔들리는 이공계 [이공계 성장 사다리 끊어진다]
첨단산업 기반인 이공계 인재 씨 마를라
20여년 경력 학회장도 올해 연구비 0원
"일시적 보릿고개 아냐... 경제위기 초래"
편집자주
이공계 인재가 기초과학과 첨단산업 발전에 기여할 리더가 될 때까지 성장 단계별로 지원하겠다는 국가의 약속은 지켜지고 있을까요. 한국일보는 "사다리가 끊어진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수도권 소재 한 이공계 대학의 박성찬(가명) 교수는 얼마 전까지 해외 유명 대학 교수였다. 외국에서 일하다 30대의 젊은 나이에 큰맘 먹고 한국행을 택한 건 나라를 위해 연구하고 제자도 양성하겠단 마음에서였다. 누구보다 열심이었고, 학계에서 주목도 받았다. 그런데 지난해 연구개발(R&D) 예산이 요동치며 위기가 왔다. 몇 달간 연구비 신청에 매달렸는데, 결과는 '0'원이었다. 박 교수는 "제자들 다 잃고, 연구 생명까지 끊길까 겁이 난다"고 했다.
윤석열 정부의 R&D 삭감 여파로 이공계 인재의 '성장 사다리'가 무너질 위기에 놓였다. 성과와 경력에 관계없이 예년보다 많은 연구자가 연구비 탈락의 고배를 마셨고, 길을 잃었다. 정부는 이공계 젊은 인재가 기초과학이나 첨단산업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리더가 될 때까지 성장 단계에 따른 맞춤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연구 현장에선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머지않아 이공계 인재는 씨가 마를 것"이란 경고가 나온다.
"젊은 인재들에 올해는 혹독한 가뭄"
25일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연구자의 성장 단계에 따른 기초연구 지원사업 중 초기에 해당하는 '생애 첫연구'와 '기본연구'가 올해 돌연 자취를 감췄다. 기초연구 지원은 '생애 첫연구→기본연구→신진연구→중견연구→리더연구' 순으로 연구비 규모와 지원 기간이 불어난다. 지난해엔 생애 첫연구(지원액 3,000만 원 내외)로 104개, 기본연구(5,000만~8,000만 원 내외)로 924개의 신규 과제를 모집했는데, 올해는 이 두 단계 지원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신진연구'의 최대 지원액을 1억5,000만 원에서 2억5,000만 원으로 늘렸다. 박 교수를 비롯해 위기감을 느낀 젊은 과학자들이 신진연구 지원사업에 대거 뛰어들었고, 그 결과 예년보다 훨씬 많은 탈락자가 나왔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올해 신진연구에 지원한 과제는 4,559개로 전년도(1,951개)의 2배가 넘지만, 선정률은 20.6%에서 14.1%로 고꾸라졌다.
우수한 연구자가 더 많은 연구비를 가져가는 게 낫다는 시각도 있지만, 성장 초기는 다르다. 20년차 이공계 대학 교수 A씨는 "이제 막 학교에 부임한 교수가 연구에 한 해 3억 원씩 쓰기는 쉽지 않다. 소액부터 과제 경험을 쌓아 점점 늘려가야 한다"며 "5,000만 원이 단비였을 젊은 연구자들에게 올해는 혹독한 가뭄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견, 리더로 성장한 연구자들 상황도 비슷하다. 중견연구 지원사업(유형1)에는 상반기에만 5,497개 과제가 접수됐고, 1,102개(20.1%)가 선정됐다. 하반기 110여 개를 추가 선정한다는 계획이지만, 전년도 선정률(24.1%)엔 못 미칠 것으로 보인다. 중견연구에 지원했다 탈락한 생명공학 연구자 B씨는 "외국에서 같이 연구하자는 러브콜이 계속 오는데, 지원서 쓰느라 정작 아무것도 못하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한국복잡계학회장을 지낸 김범준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는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연구비 '0원' 수모를 겪었다. 그는 "내가 선정되면 떨어질 젊은 후배들이 자꾸 생각나 이제 연구를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노벨상 후보를 키워내겠다며 해외 석학들을 영입한 기초과학연구원(IBS) 역시 가뭄을 피해가지 못했다. IBS 예산은 2021년부터 4년째 감소세인데, 올해는 무려 154억4,800만 원 줄었다. 전년도 대비 10.5% 감소한 규모로, 직전 5년간 연평균 증감률(-0.1%)과 크게 차이 난다. IBS 내부에서는 '이럴 거면 왜 한국에 데려왔나'라는 볼멘소리까지 나온다는 전언이다.
"연구비 복원? 허비한 시간 되돌릴 수 없어"
연구자들은 이번 사태가 단순히 일시적인 보릿고개가 아니라 이공계 근간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염려했다. 기초과학을 포함한 이공계 분야 대부분이 첨단산업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국가경제 위기마저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범준 교수는 "이제 막 대학원생을 뽑고, 해외 학회에 진출하고, 최신 장비를 사야 하는 젊은 인재들이 거듭 좌절을 겪으면 미래가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지도교수가 어려움에 처한 연구실의 학생들은 실험 대신 아르바이트로 내몰리고 있다. 이공계 대학에 최근 부임한 C교수는 "학생들도 과제에 참여하면서 성장하는 건데 교수부터 기회가 없으니 앞으로 새로운 연구, 큰 연구를 할 인력을 충분히 키울 수 있겠나. 나중에 다시 연구비를 준대도 허비한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박성찬 교수는 "기술 발전에는 인적자원이 가장 중요하다. 선택·집중한 분야만 지키려 했다가는 어떤 피해로 돌아올지 모른다"고 꼬집었다.
오지혜 기자 5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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