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사 없는 모자 쓰고… ‘메이저 여왕’ 오른 양희영
서른다섯 나이에 메이저 트로피를 처음 안아 본 양희영은 사실 ‘천재 소녀’ 출신이다. 호주로 골프 유학을 떠나 2006년 유럽 투어에서 당시 최연소 기록(만 16세)을 세우며 우승했다. 2008년 미국 여자 프로골프(LPGA) 투어에 데뷔했을 때 ‘리틀 박세리’ ‘호주의 미셸 위’로 통했다.
기대와 달리, 그때부터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2013년 투어 6년 차가 되어서야 첫 우승을 했다. 챔피언 퍼트를 넣고 그는 소리 내 울었다. 슬럼프와 번아웃에 시달렸다. 2년에 한 번씩 태국에서 우승(2015·2017·2019 혼다 타일랜드)하긴 했지만 과거 천재로 통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2022년 나이 서른셋. 팔꿈치 부상으로 골프채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통증을 겪었다. 부상을 극복하고 2023년 시즌 최종전에서 우승을 추가했다. 4년 9개월 만이었다.
24일 미국 워싱턴주 사할리 컨트리클럽(파72·6601야드)에서 양희영은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총상금 1040만달러) 4라운드를 2타 차 단독 선두로 출발했다. 그는 메이저 우승 문턱에는 누구보다 많이 가봤다. 준우승이 두 번, 5위 안에 12번, 10위 안에 21번 들었다. “위대한 선수들이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는 걸 보면서 자랐다. 언제나 메이저 우승을 원했고, 여러번 아주 가까이 갔다. 은퇴 전에 메이저 우승을 할 수 있을지 나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단독 선두. 메이저 대회 최종 라운드를 선두로 출발한 건 세 번째였다. 올 시즌 6승을 올린 세계 1위 넬리 코르다(26·미국)가 81타를 치고 컷 탈락했을 만큼 코스는 까다로웠다. 양희영은 전날 밤부터 긴장감에 시달렸다. 인생에서 가장 긴 18홀처럼 느껴졌지만 스스로를 믿어보기로 했다. “일단 어떤 샷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서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코스가 어렵고 허리 통증이 약간 있어 오히려 집중이 잘됐다.” 페어웨이가 좁고 거대한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코스에서 탁월한 쇼트게임을 무기로 경기를 풀어갔다. 보기 이하를 기록한 홀이 나흘간 7개로 출전 선수 중 가장 적었다.
7타까지 타수 차를 벌린 상황에서 16번홀(파4) 3퍼트로 보기, 17번홀(파3) 티샷을 물에 빠뜨려 더블보기가 나왔지만 첫 메이저 우승에는 문제 없었다. 버디 5개, 보기 3개, 더블보기 1개로 이븐파를 쳐 최종 합계 7언더파 281타를 기록한 그는 공동 2위(4언더파) 고진영(29)과 릴리아 부(27·미국), 야마시타 미유(23·일본)를 3타 차로 제쳤다. 투어 통산 여섯 번째 우승. 상금 156만달러(약 21억원)를 받았다. 투어 데뷔 17년 만에, 75번째 출전한 메이저 대회에서 마침내 메이저 우승 꿈을 이뤘다. 한국 선수로는 최고령 메이저 우승이다.
그게 다가 아니다. 세계 랭킹을 극적으로 끌어올려 파리 올림픽 출전권까지 따냈다. 세계 랭킹 25위였던 터라 이번 대회에서 성적이 좋아야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2016년 올림픽을 공동 4위로 마친 아쉬움을 풀 기회를 잡았다.
양희영은 한때 은퇴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나이도 들고 부상도 겹쳐서였다. 메인 스폰서 계약을 맺지 않고, 웃는 얼굴을 새긴 흰 모자를 쓴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부상을 이겨내고 지난해 우승했을 때 스폰서 로고 없는 모자를 썼다. 이날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우승 이후 후원 제안은 있었으나 진행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시간 꾸준히 상위권 성적을 이어와 이날 투어 통산 상금 6위(1555만5362달러·약 216억원)로 올라섰다. 한국 선수 중에선 4위 박인비(36·1826만2344달러·253억원·통산 21승) 다음이다. 양희영은 아직 은퇴하지 않은 큰 이유가 메이저 우승이었다고 밝혔다. “골프는 정말로 나 자신과 싸움이구나. 해낼 수 있다는 걸 나 자신에게 증명했다.”
양희영 우승은 올 시즌 한국 선수 중 처음이다. 개막 후 16번째 대회에서 나왔다. 한국 선수 메이저 우승은 2022년 이 대회 전인지(30) 이후 2년 만. 세계 랭킹 7위 고진영이 이번 대회 준우승으로 올 시즌 가장 좋은 성적을 냈다. 세계 12위 김효주(29)는 이번 대회를 공동 16위(1오버파)로 마쳤다. 올림픽 출전 마지막 기회를 노린 세계 24위 신지애(36)는 컷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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