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준의 포스트잇] [30] 종이책 은하계에서 온 메시지
지하철 안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어디에서든 행여나 ‘종이책’을 읽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면’ 이런 환상에 젖게 된다. 오직 그만이 흑백영화 같고, 나머지는 컬러TV 속 영상인 듯한 그런 환상. 그는 20세기 말의 어디쯤에서 현재로 홀로 떨어져 나와 종이책을 읽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촛농 같은 이어팟으로 귀를 밀봉한 채 스마트폰에 얼굴과 영혼을 처박고 있다.
역으로, 만약 저런 장면이 담긴 그림을 20세기 말 사람들 앞에 내놓았다면 필경 ‘대체 무슨 상황을 그린 거지?’하는 퀴즈가 됐을 터이다. 노자(老子)가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했으되, ‘변화(change)’야말로 그러하다. 생로병사(生老病死)와 흥망성쇠(興亡盛衰)라는 기본값은 물론이요, 가령 전화교환수, 타이피스트, 버스차장, 단관영화관, 주판, 호출기(삐삐) 등등이 사라지는 것에는 이의 제기 자체가 부질없다.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스마트폰조차 머잖아 무언가로 대체될 거라는 마당에 하물며 1962년 문명비평가 마샬 맥루한이 명명하여 논했던 ‘구텐베르크 은하계’ 즉 종이 인쇄 활자 세계는 침체와 소멸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처럼 보인 지 오래다.
그러나 지금 잠깐 아주 작게나마 가져보는 종이책에 관한 성찰은, 인간의 중요한 일면을 깨우치는 이득을 준다. “나는 종이에 적힌 글자는 뭐든 집중해서 읽는 습관이 있는데, 그 덕에 참혹한 시절들을 견딜 수 있었어요. 아니었다면, 우울증 정도가 아니라 정말 미쳐버렸거나 죽었을 거야.” 한 원로 배우의 고백을 기억한다.
한데 재밌는 사실은, 잘 둘러보면 이런 경우가 의외로 적지 않다는 점이다. 개별 종이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떠나서, 본질이 숲과 나무로부터 온 종이책을 조용히 사각사각 넘기며 몰입하는 ‘그 행위’는 인간에게 데미지(damage) 없는 치유와 안식을 준다. 종이책을 읽는 동안 사람은 제 삶의 목수가 되어 직접 양손으로, 열 손가락으로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만들고 있다는 존재감을 ‘물질적’으로 느낀다.
반면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보든 활자를 읽든 간에 그것은 도파민 중독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고 뇌(腦)는 몸과 자존감에서 유리된 채 ‘공회전’하며 몰락해 간다. 무엇보다, 도파민으로 전달된 쾌락은 고통과 허무로 전환된다. 역설적이게도, 부패하지 않는 쾌락은 보람된 고통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디지털이 아날로그보다 무조건 우세하다고 착각하곤 하는데, 실상 고장이 잘 나고 전원만 끊기면 시스템 자체가 블랙아웃이 돼버리는 디지털에 비해, 아날로그는 튼튼하고 인간의 마음을 전원으로 삼는다.
대한민국은 기괴한 나라다. 국민은 책을 안 읽는데 출판사는 계속 늘어가고 우수한 출판인은 많다. 책 안 팔리는 것보다 독서의 수준이 저질인 게 더 큰 문제이지만, 이 우울증과 정신 질환의 시대에 좌선(坐禪) 같은 효과를 내는 ‘종이책테라피(therapy)’를 다각도로 알리고 유포시키는 일이 사회의 심리적 안정에도 절실하다. 스마트폰 같은 것들이 수천 번 없어진들, 종이책 은하계는 멸망하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나라는 정치의 자리에 정치 대신 정신병이 있기 때문이다. 온갖 방법들을 다 동원해 치료하는 게 옳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