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원호]식탁에서 자녀와 정치 얘기 해본 적 있습니까
민주주의 전승할 ‘정치사회화’ 작동 안 돼
가까운 사람들간 정치대화, 민주주의 요건
당신이 평균적인 한국 국민이라면 아마 우리 정치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국 정치가 지닌 심각한 문제점에 대해 준비 없이 두어 가지를 열거할 수 있고, 그 해결책에 대해서도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다만 당신은 정치인들, 혹은 “저쪽” 정치인들의 부패와 기득권 때문에 정치가 절대로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의 정치 지식이나 역량, 정치에 대한 관심 수준은 세계 어느 나라 국민과 비교해도 최상위권으로 나타난다. 정치는 세계 최하이지만 국민의 정치 역량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는 그렇게 착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내 잘못이 아니라 저들의 잘못이라고.
그러나 여기 당신의 정치 역량을 가늠해 볼 하나의 테스트가 있다. 과연 당신은 당신의 자녀와 정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고 의견을 주고받는가. 아니, 공동체로서 우리는 우리 후속세대에게 전승할 한마디가 준비돼 있는가.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의 한 형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참여하고 소통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이들과 함께 민주주의를 실천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것이다.
선거권은 만 18세로, 정당 가입은 만 16세로 낮추는 입법이 있었던 것이 벌써 수년 전, 그러나 우리는 이들에게 아무런 준비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선거법과 정당법에 의하면 이제 우리와 동등한 공민권을 지닌 “동료 시민”들을 우리는 준비 없이 맞고 있다. 투표소를 어떻게 찾아가고 기표를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는 단순한 홍보 동영상으로는 어떻게 토론하고 참여하고 실천할 것인지, 어떻게 민주주의를 처음으로 앓아보고 알아가야 할지가 생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의 젊은 유권자들은 그래서 첫 투표 기회에 매우 높은 정치 관심도와 투표 참여를 보인 후, 급격히 정치에서 이탈한다.
소위 정치사회화(Political Socialization)가 가정과 학교에서 진행되지 않았고 그래서 실패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교육과 정치가 상극이라는 절대 명제 아래,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정치에 대한 절대 침묵으로 해석되었을 것이며, “민주시민 교육”은 그 이름만으로 학부모 항의 전화의 대상일 따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장 주요한 문제는 부모가 자녀들에게, 기성세대가 후속세대에게 별로 해 줄 말도 없다는 점이다.
정치 토론과 정치사회화는 어떤 형태로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려스러운 가능성 중 하나는, 만약 우리의 젊은 유권자들이 포털이나 유튜브 댓글을 통해 처음으로 정치 토론을 보거나 실천하게 되고, 이것이 우리 정치 재생산 과정의 중심축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네이버와 유튜브에 민주시민 교육의 외주를 맡기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민주주의의 내일은 오늘보다도 훨씬 어둡다.
이상과 같은 정치사회화의 실패는 우리 민주주의, 혹은 세계 민주주의가 다 같이 겪고 있는 위기의 징후들과 직접 닿아 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온라인 저편의 누군가에게 내가 관용을 베풀 수 있을 것인가. 그곳에서 만나는 타인들이 나와 같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믿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대니얼 지블랫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온라인에서 타인들의 관심을 끌고 동지들을 가장 확실하게 규합할 수 있는 방법은 “제도적 자제”의 반대말, 즉 법 테두리 내에서 가능한 한 가장 극단적인 “어그로”를 끄는 것이다. 지지자들은 환호할 것이고 상대편 지지자들은 저주할 것이다. 정당들은 내심 안심할 것이고, 그 와중에 언론은 그 갈등을 기꺼이 팔아먹을 것이다. 아무도 이를 중단할 인센티브가 없다. 나는 이것이 우리 민주주의의 현재를 서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들, 특히 정치적 양극화와 관련된 수많은 연구와 논의가 있었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도 개혁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개헌과 선거제도 개정 논의를 하지 않았던 정권이나 국회는 없었고, 이번 22대 국회에서도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 개혁보다 열 배는 더 어려운 것이 문화를 바꾸는 일이다. 구체적인 대상과 절차가 있는 제도 개혁과는 달리, 정치 문화를 바꾸는 일은 개인들의 변화와 함께 기나긴 시간에 걸친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자녀들, 후속세대들에게 보다 나은 정치적 토양을 만들어 주고, 적어도 현재보다는 나은 내일의 정치를 물려주는 것이 기성세대의 임무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 저녁 식탁에서는 스마트폰을 보기에 여념이 없는 자녀들에게 어색함을 무릅쓰고 차기 대선 후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보는 것은 어떻겠는가. 세상은 그렇게 바뀌는 것이다.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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