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파 귀국후엔… “재산파악 확실히, 이웃은 가까이, 송사는 멀리”[설혜심의 매너·에티켓의 역사]
유럽 상류층 청년들 사이 유행
귀국후 적응 못해 각종 사회 문제
“고향 토지 등 재산 정확히 확인… 이웃 초대하고 연줄 만들라” 조언
‘고향에 도착하면 먼저 자신의 재산에 대해정확하고도 확실한 정보를 파악해야 한다.’
‘유학 후 고향에 잘 적응하는 법’(1682년)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기서 유학은 그랜드 투어라 불린 관행을 가리킨다. 그랜드 투어는 18세기 유럽에서 어린 청년이 교육을 위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던 관행을 일컫는 말이다. 종교분쟁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영국 상류층은 자식을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으로 보내 외국어와 세련된 취향을 배워 오도록 했다. 이 여행은 엘리트 교육의 최종 단계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학생이 고국에 적응하는 일은 또 다른 문제였다. 실제로 18세기 영국에서는 귀국한 유학생들의 행태가 큰 문제로 대두했다. 외국에서 놀고 즐기던 생활습관을 계속하려 했는가 하면 영국이 답답하고 촌스럽다면서 유럽 대륙의 문화를 무조건 숭앙하고 모방하려는 등 꼴사나운 행동이 만연했다. 그런 탓에 여행에서 돌아온 영국인에게는 ‘마카로니(macaroni)’라는 경멸 어린 별명이 생겨났다. 마카로니는 여행자가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맛보게 되는 음식을 뜻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지침은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재산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라는 것이었다. 만약에 빚이 있다면 갚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갚고, 가용할 만한 생활비가 얼마인지를 계산해야 했다. 재산을 보존하고 늘려갈 방법도 진지하게 궁리해야 했다. 얼핏 젊은이의 진로에 관한 조언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재산 문제가 핵심이었다. 이 시기에 영국 역사상 최초로 재산권이 공공의 화두로 떠올랐던 때문이다. 1660년 왕정복고 후 영국 귀족은 재산과 관련된 모든 봉건적인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확보한 개인의 재산권은 영국이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자본주의에 진입하게 만든 중요한 토대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좀 더 복잡했다. 설사 자기 이름으로 된 재산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재산의 대부분은 토지로 이루어졌는데, 토지의 처분은 명목상의 ‘절대적인 지배권’과는 조금 달랐다. 영국에서 토지는 경제적 자원일 뿐 아니라 한 가문이 특정 지역을 지배하는 상징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가문의 영속을 위해 영지가 처분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다양한 안전장치가 존재했다. 귀국한 젊은이는 이런 변수들을 모두 고려해 자신의 재정적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고향에 돌아온 젊은이가 지켜야 할 또 다른 지침은 고향에 대해 진정한 애착을 갖는 일이었다. 게이야르는 부재지주(不在地主)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젊은이가 반드시 고향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재지주는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일단 고향에 정착하면 지위에 걸맞은 좋은 집을 마련하고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이 방문하도록 만들라고 독려했다. 접촉하는 사람 모두의 자질과 지위에 어울리는 예의를 갖추는 일도 중요했다. 크고 작은 행사에 가난한 이웃 사람들을 최대한 고용할 것이며 소작인들에게 까다롭게 굴지 말라고 당부했다.
‘유학 후 고향에 잘 적응하는 법’에는 눈에 띄는 또 다른 지침이 있다.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소송이나 재판을 최대한 피하라는 조언이다. 소송은 비용이 많이 들고 사람을 지쳐 쓰러지게 하며 거의 성공하지 못하고 오직 법률가를 살찌울 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법정에 가려면 가방 네 개를 가져가야 한다는 말이 있다. 하나에는 아주 좋은 이유가 담겨 있고, 두 번째 가방에는 연줄, 세 번째에는 돈, 네 번째 가방에는 인내가 가득 들어 있어야 한다. …정의를 수호하겠노라고 맹세하고 법조계에 진입한 사람들은 전혀 반대의 일만 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들은 부정과 손을 잡거나 돈만 밝히며, 모든 손해와 처벌은 패소한 사람이 짊어져야 한다.’
이처럼 법조인을 부정적으로 그려낸 이유는 당시 사회에서 법률가의 평판이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치안판사는 ‘뇌물 받는 치안판사(trading justice)’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사법부의 부정부패를 한 몸에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
근대 초 영국이 탄생시킨 ‘재산권의 불가침성’은 상업과 산업의 발달을 촉진해 ‘자유주의적 경제 시스템’의 토대를 구축했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예법서에서까지 법적 분쟁을 피하라는 내용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런 해석에 균열을 준다. 현실은 미성숙한 법체계와 자격이 부족한 법조인들이 영국 역사가 자랑하는 그 재산권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했던 것이다.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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