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설]전원일기와 국가비상사태
1991년 방송된 <전원일기>(535화) 한 장면이다. 양촌리 대표 노총각인 명석을 어떻게든 장가보내려는 그 어머니에게 중매쟁이가 조언한다. “부엌을 신식으로 고쳐야지, 이래가지곤 색시가 안 와요.” 이 말을 전해 들은 명석과 동네 남자들은 “개 발에 편자”라며 못마땅해하고, 여자들이 모인 자리에선 “구식 부엌에서 밥하면 설익는다니? 우리는 수십년간 밥만 잘해먹고 살았다”는 핀잔이 나온다.
그러나 아궁이 부엌을 싱크대로 바꿨는데도 명석의 맞선은 파토난다. “시골로는 절대 시집보낼 수 없다”는 가족 반대로 상대 여성이 나오지 않은 것이다. 명석은 집에 돌아가 싱크대에서 국을 끓이는 어머니를 보며 괜한 돈만 들였다고 후회한다.
갑자기 <전원일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 장면이 현재 한국 사회 모습을 시대에 앞서 풍자한 일종의 ‘예언적 예술 작품’에 가깝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난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인구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는데, 이 비상사태라는 것은 아이를 낳지 않는 젊은 세대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일까, 아니면 사회가 이대로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성세대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일까? <전원일기>에 대입하면 답을 쉽게 낼 수 있다. 양촌리 노총각들이 장가를 못 가는 것은 양촌리의 위기이지, 시집오지 않는 도시 여성들의 위기가 아니다.
다른 문제에도 적용해보자. 제조업 인력난이 심각한데, 이 문제로 위기에 처한 것은 누구일까? 사업주와 산업 관계자들뿐 아니라 ‘좋은 일자리’를 못 찾고 알바만 전전하는 청년들에게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절대 가고 싶지 않은 이유들이 있다는 목소리는 왜 듣지 못할까? 지난 16일, 전주 제지공장에서 19세 노동자가 혼자 기계를 점검하다 사망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는 동안 “근무환경을 혁신적으로 바꾸고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계속돼왔다. 그런데도 눈 가리고 아웅식 대응만 하고는 “이만하면 됐지, 더 이상은 못한다”고 해온 사람들은 아궁이를 싱크대로 바꿔놓고 그 돈도 아까워하는 1991년 양촌리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
그 외 중소기업 구인난, 청년들의 잦은 퇴사 및 취업 유예, 지역의 도심 공동화, 청년 인구 순유출 등 현상들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고 현금 지원까지 해봐도 정책 대상자들이 꿈쩍하지 않는다는 점이 거의 비슷하다.
이 모든 문제에서 청년들의 입장은 <전원일기> 535화에서 얼굴도 나오지 않은 ‘맞선 상대 여성’이 대변할 수 있다. “양촌리 사람들이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자신들이 살아온 방식을 유지하고 싶어서이지 나라는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서가 아니다. 내 인생은 하나뿐인데, 그들 처지가 어떻든 내 인생을 내줄 수는 없지 않은가?”
즉 오래되고 낡은 구조를 지탱하려는 의도, 젊은 세대를 어떻게든 끌어들여 이 구조를 떠받치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대안은 결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정책과 자원과 정치력을 쓴다면 청년들이 살아가고 일하고 싶어하는 형태로 구조를 혁신하는 데 써야 한다. 그런 전환이 없을 때 대한민국이 맞이할 미래가 궁금한가? <전원일기> 535화 방송 이후 33년이 지난 지금 농촌의 현실이 그 답이다.
황세원 일in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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