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자 넘어 권력자 군림하려는 ‘팬덤 시민’…민주주의 퇴행시키는 ‘폭력’일 뿐[2024 경향포럼 기고]
팬덤 정치는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선호를 존중하는 다원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선호의 다양함, 이견의 풍부함은 존재할 수 없고, 오로지 누군가에 대한 추종과 또 다른 누군가에 대한 혐오만 있기 때문이다. 국민 주권, 당원 주권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즐겨 악용하는 포퓰리즘 정치이기도 하다. 그들은 시민의 직접 참여와 당원의 직접 결정을 민주주의로 착각한다. 아니, 착각하게 만들어 자신들의 위세를 키우려 한다. 시민과 당원을 ‘권리자’를 넘어 ‘권력자’로 만들려는 잘못된 열정이 팬덤 정치를 지배한다.
유럽의 포퓰리즘은 난민이나 복지, 유럽연합을 둘러싼 정책 갈등에서 발원한다. 미국의 포퓰리즘은 이민 문제나 외교정책을 둘러싼 갈등으로 나타난다. 그와는 달리 한국의 팬덤 정치는 정책 문제와 거리가 멀다. 누가 당의 대표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지를 둘러싼, 배타적 권력 욕구가 만든 억지 갈등일 뿐이다. 우파 포퓰리즘이 압도적인 유럽이나, 공화당의 트럼프 지지자들이 문제가 되는 미국과는 달리 한국은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지지자들이 팬덤 포퓰리즘을 이끌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일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정치체제는 퇴행한다. 팬덤 정치 또한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과 관련된 현상이다. 정치체제의 퇴행은 주권자의 오만에서 비롯된다. 군주의 오만이 전제정을 낳고 귀족의 오만이 과두정을 낳았듯, 민주정에서 오만한 시민의 지배는 폭민정으로 이어진다. 시민이 사나워져 폭도와 다르지 않게 된다는 것인데, 2021년 1월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에 난입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팬덤 당원에게 정당은 물론 국회나 정부의 결정을 맡기면, 한국 민주주의도 폭민이 지배하는 시대로 퇴락할 것이다.
민주주의는 ‘권리’와 ‘권력’을 분리한 체제다. 시민은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다. 대신 권력은 적법하게 선출된 자신들의 대표들에게 위임한다. 공권력은 오로지 평등한 시민들이 선출한 대표들만 맡을 수 있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의 권리를 누리는 비통치자 시민과는 달리, 공적 권력을 행사하는 통치자 시민은 자유와 권리를 제한받는다. 재산 형성 과정은 공개되어야 하고 이해충돌 사안은 통제를 받아야 한다. 공권력을 다룰 특권은 있지만, 사적 이익을 추구할 권리는 절제하는 자에게만 통치를 맡길 수 있다.
시민은 공권력의 향방을 결정하는 ‘최종 결정자’이지만, 권력자도 통치자도 아니다. 정부를 비판하는 시위를 할 권리는 있지만, 정부청사를 자유롭게 드나들고 국회를 헤집고 다니며 자신의 요구를 강제할 권력은 없다. 군사력을 가진 시민이 그런 일을 하면 군부독재라 하고, 행정 관료가 시행령을 통해 법과 예산을 마음대로 운용하면 관료독재라 한다. 누구든 법의 범위를 벗어나 권력자가 되려 하면 처벌해야 한다.
공권력은 선출직 공직자가 다룬다. 다만 그들은 ‘책임’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어야 한다. 권리를 가진 자에게는 ‘자유’를, 권력을 가진 자에게는 ‘책임’을 부과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권리(자유)와 권력(책임), 이 두 짝의 균형이 중요하다. ‘비호감 선거’라는 현상은 이 균형이 깨졌을 때 발생한다. 시민의 다양한 권리, 예컨대 노동자의 권리, 사용자나 자영업자의 권리, 여성의 권리, 지역민의 권리, 복지 수급자의 권리, 교육받을 청소년의 권리, 생태와 평화를 위한 권리를 둘러싼 정책 경쟁이 아니라, 오로지 누가 최고 권력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경쟁하는 무쟁점, 무정책의 권력 선거가 되면 팬덤 당원이나 팬덤 시민 이외에 다른 누구의 권리나 자유도 평등하게 고려될 수 없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국가 폭력과 싸워야 했다. 팬덤 시민·당원이 권력자로 동원되고 있는 지금은 주권과 민주주의를 앞세운 자들의 폭력을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당원이고 내가 시민이고 내가 주권자여서 내가 원하는 권력을 내가 만들겠다는 사람들의 무례함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국회를 불 지르고 싶은 열정, 대통령 집무실을 폭파하고 싶은 열정, 내가 증오하는 정치가를 제거하고 싶은 열정을 부추기는 괴이한 정치다. 악성 포퓰리즘이다.
박상훈 정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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