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세계 - 이종필의 과학자의 발상법]20% 확률에 거는 기대와 가치…에너지전환 없인 ‘독 든 성배’

기자 2024. 6. 2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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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대왕고래의 꿈을 위한 조건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동해 시추에 최대 1조원 필요…‘실패조차 감수할 만한 가치’ 로켓·탐사선 발사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아
‘과감한 도전’ 앞서 정부·석유공사·액트지오 ‘의혹’ 해소 과제…신재생에너지 중심 구조 재편 시급
극한의 한반도 환경 극복 K-자주포·전차처럼…‘자원 부족 국가’ 한계 뛰어넘는 노력 계속돼야

2년을 훌쩍 넘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가장 주목받는 무기는 드론이다. 수십만원짜리 드론 하나가 100억원이 훌쩍 넘는 전차를 때려잡으니까 ‘전차무용론’이 나올 법도 하다.

지난 2차 대전 때 구소련은 지금의 드론만큼이나 아주 신박한 대전차 무기를 개발했었다. 바로 ‘대전차견’이었다. 대전차견은 자살용 폭탄을 짊어진 개다. 소련은 나치의 전차부대를 막기 위해 수만마리의 대전차견을 훈련시켰다.

결과는 어땠을까. 완벽한 실패였다. 이유 중 하나는 이랬다. 대전차견들은 소련의 전차를 상대로 훈련을 하면서 소련의 전차가 연료로 쓰던 경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나치의 전차들은 경유가 아니라 휘발유로 움직이고 있었다! 폭탄을 매고 적진으로 뛰어들던 소련의 대전차견들은 (물론 나치의 기관포에 기겁하기도 했겠지만) 훈련받은 냄새를 쫓아 자신의 아군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고 한다.

독일은 석유가 나지 않는 나라여서 전차를 굴리고 비행기를 띄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독일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던진 것이 바로 합성석유였다. 석유가 없는 독일이었지만 다행히 석탄은 아주 풍부했다. 게다가 히틀러가 등장하기 이전 독일에는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 또한 많았다. 프리드리히 베르기우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베르기우스는 석탄을 석유로 바꾸는 이른바 ‘베르기우스 공정’을 창시했다. 독일의 6개 화학공업기업의 연합체인 이게 파르벤(IG Farben)은 베르기우스 공정 등을 이용해 대규모로 합성석유를 생산했다. 이게 파르벤의 초대회장인 카를 보슈는 유명한 화학기업인 바스프 출신으로, 칼스루헤 대학의 프리츠 하버가 개발한 암모니아 합성법을 바스프에서 대규모로 생산하는 공정을 완성(‘하버-보슈 공정’)한 인물이었다. 하버-보슈 공정은 작물성장에 필수적인 비료를 공업적으로 대량생산하는 것이어서 인류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프리츠는 1918년 단독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고, 베르기우스와 보슈는 1931년 노벨 화학상을 공동으로 수상했다.

독일 내륙의 로이나에 세운 화학공업단지는 보슈의 야심작으로, 나치의 전쟁을 수행하는 핵심군수시설이었다. 나치가 사용한 가솔린의 4분의 1이 여기서 생산되었다. 전쟁에 필요한 폭약과 합성고무도 함께 만들었다. 나치의 가장 중요한 전략자산이었던 만큼 대공방어망도 독일에서 가장 촘촘했다. 연합군은 1944년부터 무려 1년에 걸쳐 로이나를 폭격했다. 로이나를 비롯한 합성석유 공장들이 무너지면서 독일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전쟁을 수행하는 근원은 에너지, 그중에서도 특히 석유였음은 명확해 보인다. 2차 대전 동안 미국이 생산한 원유는 약 8억3000만t임에 비해 독일의 생산량은 합성석유를 포함해 겨우 3300만t에 불과했다. 지금도 석유는 여전히 전쟁 수행에 필수불가결한 에너지원이다. 아직까지 정전상태를 유지하며 북한과 군사적으로 대치 중인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평상시 훈련을 위해서도 석유가 필요하다. 동북아 최강으로 꼽히며 유럽 전체와 맞붙어도 충분히 이긴다는 한국의 제7기동군단에는 전차만 1000대 가까이 있다고 한다. 그밖에 수많은 장갑차와 차량, 아파치 헬기 등을 움직이는 건 결국 석유이다.

아직도 석유가 세상을 움직이는 이유 중 하나는 큰 에너지를 집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솔린은 같은 무게의 석탄이나 메탄올보다 2배 많은 에너지를 갖고 있다. 우리가 석유를 사 오는 중동이나 주요 보급로인 대만 인근의 정세가 불투명해지는 요즘, 포항 앞바다에 대규모 석유와 천연가스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정부의 발표는 가뭄 속 단비만큼 기쁜 소식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에 지목된 지역에 석유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20% 정도이고 탐사 시추에 들어가는 총비용이 최소 5000억원에서 1조원 이상 될 수도 있다고 해서 시추 자체에 부정적인 여론이 많다. 주로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한국경제신문에서는 지난 6월10일 자 기사에서 포항 앞바다 석유는 로또가 아니라는 취지로 보도하기도 했었다. 매장량 추정치가 최대 140억배럴이라고는 하지만 1인당 매장량이 국민소득을 감안했을 때 3800만원 정도의 가치(배럴당 100달러 기준)여서 인생역전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6월12일 국제에너지기구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30년에는 전 세계 석유의 공급량이 수요를 크게 초과해 하루에 약 800만배럴이 과잉 공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동해에서 석유가 나오더라도 경제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스스로 덜 보수적이라고 여기는 내 입장에서는 20%의 확률과 5000억~1조원의 비용이면, 이 숫자들만 놓고 봤을 때 충분히 시추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마치 실패할 확률이 꽤 높더라도, 그래서 엄청난 개발비를 날리더라도,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라도 우리가 우주로 로켓을 쏘고 탐사선을 보내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만큼 실패조차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과감하게 도전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전제조건이 두 가지 필요하다.

첫째, 정부와 석유공사, 그리고 컨설팅 업체인 액트지오가 발표한 내용이 그대로 온전히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을 만한 결과여야만 한다. 거짓 정보와 잘못된 분석으로 나온 결과라면 천문학적인 혈세가 사기꾼의 주머니만 채워주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주무부처나 석유공사에서 액트지오와 관련된 여러 의혹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액트지오가 세금을 체납했다는 사실이 일개 언론사의 취재로도 금세 드러났는데, 정부와 석유공사는 어떻게 이를 몰랐을까? 데이터분석과 평가를 위해 입찰한 업체 3곳 중에서 이른바 업계 ‘빅3’ 중 둘을 제치고 사실상 1인 기업이나 다름없는 액트지오가 선정된 것이나, 분석결과를 검증한 사람이 액트지오의 아브레우 고문 및 석유공사의 업무 담당자와 아는 인맥으로 얽혀 있었다는 점도 석연찮은 점으로 꼽힌다.

둘째, 우리의 에너지구조를 신재생에너지 중심으로 재빨리 재편해야 한다. 지금은 중동의 산유국들조차 ‘석유 다음’의 세상을 준비하고 있는 시대이다.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탈탄소가 거대한 시대적인 흐름이기도 하다. 글로벌 기업들의 자발적인 캠페인이라고는 하나 RE100은 이미 하나의 규제 내지 무역장벽의 역할을 하고 있다. 말 그대로 석유를 바닥에 깔고 앉아 있는 미국의 텍사스주에서는 태양광 발전량이 캘리포니아주를 넘어섰다고 한다. 중국의 태양광 업체들이 생산하는 전력규모는 세계 메이저 에너지 회사들의 발전 용량과 비등해졌다. 태양광이든 풍력이든 한반도 환경과 잘 맞지 않는다는 얘기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가 만든 명품 무기인 K-9 자주포와 K-2 흑표 전차가 요즘 전 세계적으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 무기들은 어떤 험지에서도(산악지형이든 설원이든 진흙구덩이든 심지어 뜨거운 사막에서든) 뛰어난 기동력과 정확한 사격 능력을 보여 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한반도의 지형과 기후가 무척이나 가혹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와 눈밭, 가파른 언덕, 세찬 강물, 한여름의 살인적인 더위를 이겨내는 무기를 만들었어야 했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 통하는 무기는 세계 어느 험한 지형에서도 통하는 무기가 되었다. 우리를 위협하는 위기의 조건들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든 셈이다.

에너지 분야에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자원이 부족한 나라라는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사활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면, 탈탄소 RE100의 시대를 누구보다 선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국토가 좁다든지 일조량이 적다든지 그런 주어진 조건들은 핑계일 뿐이다. 한반도보다 위도가 높고 해만 뜨면 사람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나라에서도 우리보다 태양광 발전을 더 많이 하고 있다. 한겨울 혹한이 너무 심하다고 해서 강추위에도 기동하는 전차를 만들지 못한 채 자연환경 탓만 하고 있을 것인가? 그랬다면 아마 지금의 K방산 신화는 결코 현실이 되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의 안보 또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열악한 지질환경에 비하면 외출할 때마다 선크림을 발라야 하는 우리네 하늘은 얼마나 고마운가. 게다가 한국 업체들의 신재생에너지 관련 기술도 상당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처럼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국가 차원으로 총력 지원한다면 우리도 에너지전환의 선두에 올라설 수 있다. 아니, 선두가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재생에너지는 어떻게든 우리가 반드시 확보해야만 하는 21세기의 ‘탄소 없는 석유’와도 같다.

차세대 또는 차차세대 전차에는 내연기관 엔진 대신에 모터와 배터리가 달릴지도 모르겠다. 전투기는 당분간 요원해 보인다.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꽤 오래 석유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서 가능성이 낮고 큰돈이 들더라도 석유탐사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게 포항 앞바다에서 석유가 터져 나온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운이 좋다면 한 번의 성공이 그다음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에너지전환의 대세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 디지털 전환에 성공한 덕분에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했지만 에너지전환에 실패한다면 다시 중진국으로 추락할 게 분명하다. 에너지전환 없는 석유는 독이 든 성배일 뿐이다.

참고한 자료 Wikipedia, “Anti-tank dog”/Wikipedia, “Military production during WWII”/David Fickling, Solar Power’s Giants Are Providing More Energy Than Big Oil, Bloomberg, 2024.6.14. / 토머스 헤이거, <공기의 연금술> / 리처드 뮬러, <대통령을 위한 물리학>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이종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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