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문예체 교육, 국가가 책임집시다 [왜냐면]
천경호 | 실천교육교사모임 회장
어린 시절 학교가 끝나면 피아노 학원 앞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거든요. 피아노 학원 앞에서 어머니께 떼를 쓰던 저는 끝내 피아노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사실 저는 다니지 못할 거라는 걸 아마 알고 있었을 겁니다. 친구들 다 다니는 태권도장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도장비는커녕 도복비 낼 돈도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어릴 적 제가 제일 먼저 배운 건, 배우고 싶은 걸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괜찮다. 어쩔 수 없다.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시는 부모님께 가슴 아픈 일을 만들어 드리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아직도 저는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익숙합니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은 아이들의 일상을 자주 접하게 됩니다. 아이들과 대화하며 방과 후 일상에 대해 듣게 되는 일이 많죠. 어떤 아이들의 방과 후 일상은 부러울 때가 있고, 어떤 아이의 하교 후 삶은 가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소득에 따른 여가 활동의 격차와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의 양과 질의 차이가 고스란히 학업 성취와 사회성으로 드러난다는 걸 경험적으로 확인하는 거죠.
2018년도 아동종합실태조사에 아동의 방과 후 희망 활동에 대한 항목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희망하는 방과 후 활동도 계층에 따라 차이가 있었습니다.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티브이(TV) 시청하기를 희망하는 비율이 높았고,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신체활동·운동하기를 희망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났습니다. 소득이 낮은 계층일수록 스마트폰 사용 시간과 티브이 시청 시간이 길며, 게임을 하는 시간도 많았습니다. 한부모·조손가정 아동의 휴대전화, 티브이, 컴퓨터 게임 이용 시간이 양부모 가정의 두 배가 넘었습니다. 소득이 낮을수록, 아이를 돌볼 어른이 적은 가정일수록 아이들의 여가 활동은 매체 의존적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건강한 아동·청소년 기를 보내야 합니다. 일상에서 문화·예술·체육(문예체) 활동을 해야 합니다. 아동·청소년 기에 각종 유해요소로부터 보호하는 제도는 있지만 이로운 환경을 제공하는 제도는 빈약합니다. 특히 계층에 따라 여가 활동의 질적 격차는 매우 큽니다. 여가 활동을 유튜브나 앱이 아닌 사람을 통해 배우려면 지불해야 할 비용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교육 격차는 학교 교육이 아니라 학교 밖 일상에서 커집니다.
따라서 성인기 이후에 다양한 취미활동을 갖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려면 아동 청소년기에 다양한 문예체 활동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도 권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모든 아이의 건강한 성장과 발달을 위해 문예체 교육의 국가 책임제를 제안합니다. 성인기가 되기 전까지 주 1회 문예체의 날을 정하여 문예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일주일에 하루는 건강한 여가 활동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아동·청소년의 정신건강에 도움을 주고, 방과 후 업무에 대한 학교 현장의 부담을 줄이며, 소득 격차로 인한 교육 격차 해소로 각 가정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학교는 기나긴 겨울방학을 줄이고, 주 4일제로 변경하여야 합니다. 현재 긴 겨울방학으로 건강한 생활습관과 수면 및 일주기 리듬의 균형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문예체 교육 국가 책임제를 실현하기 위한 학교 시스템의 개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제안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문예체 교육 전담 정규교원을 중심으로 한 문예체 선택형 교육과정 운영을 통해 각 학교에서 해당 학교 학생들의 문예체 교육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정규교원 채용이 부담된다면 각 지자체 중심의 문예체 교육 운영도 가능합니다. 전일제 학교를 운영하는 유럽의 여러 국가처럼 방과 후 활동 프로그램의 계획 및 운영을 지자체가 전담하여 각 지역의 문예체 전문가를 직접 발굴하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며, 아동·청소년에게는 양질의 문예체 교육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교육 격차 해소는 모든 학생에게 디지털 기기를 제공함으로써 실현할 것이 아니라 양질의 문예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과 제도 마련을 통해 실현해야 합니다. 여전히 공공 사회복지 지출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국가 중에서 35위(2019년 기준)에 불과하며 회원국 평균 20%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12.2%입니다. 우리가 낸 세금을 환급받아서 기뻐하기보다 문예체 교육의 국가 책임제를 통한 모든 아이의 건강한 교육환경 조성이라는 목적 아래 우리의 미래를 위해 쓰여서 기뻐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정부가 앞장서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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