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에서 시민운동가로 변신 30년…이제 은퇴합니다”

최예린 기자 2024. 6. 2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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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 대전 시민사회 맏형’ 이광진 대전경실련 사무처장
지난 18일 대전 서구 용문동의 대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무실에 한겨레와 만난 이광진 대전경실련 사무처장. 최예린 기자

이광진 대전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대전경실련) 사무처장(61)은 대전 지역에서 가장 오래 활동한 시민사회운동 1세대다. 1994년 대전경실련의 상근 활동가로 시민단체 일을 시작한 이 처장은 30년 동안 지역 시민사회 맏형으로 현장을 지켰다. 시민사회운동이 시작된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쳐 지금까지 그는 단 한 번의 외도 없이 지역에 남아 시민·사회 개혁에 헌신했다.

올해 6월로 정년퇴직을 하고 상근 활동가 자리를 내려놓는 이 처장을 지난 18일 대전 서구 용문동의 대전경실련 사무실에서 만났다.

1990년 회원 가입한 대전경실련이 목사로 있던 교회 공간에 더부살이
같은 건물이라 짬짬이 도와주다
1994년 상근 활동가로 눌러앉아
“목회자 일이 교회 안에만 있지 않아”

‘경실련 터줏대감’으로 유명한 그는 사실 기독교 대한감리회 소속 목사이다. 현재 대전 빈들감리교회 부목사를 맡고 있기도 하다. 기독교 목사가 어떻게 하다 평생 시민사회운동에 헌신하게 됐을까? 1984년 목원대에서 신학 공부를 시작한 그는 경실련이 만들어진 1989년엔 새내기 목사로 대전에서 청년들을 위한 사역에 매진하고 있었다. 대전경실련과는 1990년 일반 회원으로 가입하며 연을 맺었는데, 당시 형편이 녹록지 않았던 대전경실련이 이 처장이 일하던 교회 청년활동 공간에 들어와 얹혀살게 됐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그때는 시민단체 형편이 많이 어려웠어요. 월급을 못 주는 상황이 반복되니 상근 활동가들이 오래 못 버텼죠. 같은 건물에 있다 보니 제가 교회 사역을 하면서도 짬짬이 경실련 실무를 도와주던 것이, 1994년부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상근 활동가로 눌러앉게 됐죠. ‘어쩌다 보니 시민운동가’였달까요, 하하.”

이 처장은 대전 지역 특수성에 맞는 ‘사회 의제’를 발굴하고 운동으로 기획하는 데 귀재였다. 대전경실련 안에 과학기술위원회를 두고 과학기술과 관련한 여러 사업을 진행했다.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의 사람 인프라를 활용해 ‘과학도시’ 대전에서만 할 수 있는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대전경실련의 중요한 역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위를 중심으로 대전경실련은 국가 주요 기술에 관한 논란을 검증하고 원자력 안정성 관련 공론화에도 힘을 보탰다. ‘우리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상황에서 ‘특허법원’ 도입이 시급하고, 그 최적지는 대덕연구단지가 있는 대전’이라고 처음 주장하며 ‘특허법원 설립 운동’을 전개한 것도 대전경실련이었다. 그 결과 1998년 특허법원 설립에 관한 법률이 마련되고, 2000년 대전에 특허법원이 설립됐다.

대덕R&D특구 등 지역 특수성 맞게
과학기술위 두고 의제 발굴·기획
특허법원·상인연합회 출범에 기여


그렇다고 ‘경제정의실현’ 운동을 소홀히 한 건 아니었다. 1997년 유통산업발전법이 제정된 뒤 국내외 대형 유통업체들이 지역까지 침투하며 중소상인들의 생존권을 위협했다. 그런 상황에서 대전경실련은 ‘중소상인 연대체가 꼭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상인회 조직과 관련한 사업을 전개했고, 2006년 ‘전국시장상인연합회’ 출범을 도왔다. 초대 회장에 송행선 대전시장상인연합회장이 선출된 것도, 전국연합회 본부가 대전에 만들어진 것도 대전경실련 노력의 방증이다. 소상공인 생존권 보장을 위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백화점 셔틀버스 운영 반대운동’을 시작한 것도, 부도 임대아파트로 피해를 본 세입자를 구제하는 법안 개정을 이끈 것도 대전경실련이다. 2016년 대전 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대전시의 상수도민영화 시도를 막아낸 성과도 대전경실련과 이 처장이 중심에서 역할을 했다. 수도권 집중화 완화와 국토균형발전 역시 대전경실련이 꾸준히 목소리를 낸 ‘운동 의제’이다.

시민사회운동을 함께 시작한 1세대 동지들이 대부분 정치권으로 자리를 옮기는 사이 이 처장은 유일하게 시민사회 현장에 남았다. 활동가 월급이 100만원도 안 되던 시절, 후원이 늘면 월급을 올리는 대신 활동가를 한명 더 뽑는 선택을 한 그이다. 아들 둘을 키우며 ‘팍팍하다’ 정도로 설명되지 않는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았다”고 이 처장은 웃었다. 이번 달을 끝으로 상근 활동가로서 삶은 마무리하지만, 시민사회에서의 그의 역할은 계속될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다’(요한일서 4장15절)는 성경 말씀이 있지요. 결국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란 말이죠. 목회자로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과 일이 교회 안에만 있는 건 아닐테고요. 그 믿음이 저를 지금까지 시민사회에 머물게 한 원동력일지 모르겠습니다.”

최예린 기자 floy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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