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민의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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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민이 만드는 제품은 우리가 고객을 신경 쓰고 있다는 최종 진술과도 같습니다. 훌륭한 제품으로 고객에게 어필한다는 이야기죠. 가민의 재무 상태를 보면 다른 기업과는 달리 광고, 마케팅에 큰돈을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돈으로 R&D(연구개발)에 투자하죠. 만약 우리가 많은 돈을 들여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는데, 고객이 우리 제품을 구매하고 실망한다면 그 대단한 광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결국은 제품입니다.” 가민의 CEO 클리프 펨블은 다른 회사와의 경영 혹은 마케팅 차별점에 대한 질문에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생각해보니 좀 이상했다. 출장을 위해 해외의 지방 소도시들을 방문하다 보면 공항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광고판이 있다. 바로 그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들의 광고다. 그런데 캔자스시티 공항에는 그런 게 없다.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클리프 펨블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혹시 그런 이유에서?’라는 의문점이 생겼다.
사실 우리에게 가민은 스마트워치 브랜드로 친숙하다. 2003년 세계 최초로 GPS(위성항법장치)가 내장된 스포츠용 웨어러블 기기를 출시했으니, 현재 스마트워치 시장을 양분하는 삼성전자 기어 S(현 갤럭시워치, 2013년)나 애플의 애플워치(2014년)보다 10년이 앞선 셈이다. 지금은 비록 스마트워치 시장점유율이 예전 같지 않지만 러닝과 사이클, 아웃도어 같은 분야에선 차별화된 제품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 라인업도 다양하고 퍼포먼스는 뛰어나며 정확도도 높다. 고성능 제품들이 많다 보니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가민 스마트워치를 찬 사람을 ‘운동꾼’으로 취급한다. 심지어 프로 선수나 올림픽 선수까지 각종 운동을 할 때 가민을 사용한다고 하니 말해 무엇할까.
그렇다고 가민이 스마트워치만 만들지 않는다. 사실 항공이나 해양 분야 종사자, 가민코리아 직원이 아니라면 쉽게 알지 못한다. 심지어 10년간 자동차 전문 매거진 에디터로 활동했던 나 역시 가민이 자동차 전장비 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올해 초 CES를 통해 처음 알았다. 전문 기자도 상황이 이런데 일반 사람이 가민이란 브랜드를 정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가민은 창립 35주년을 기념해 가민의 시작이자 심장부인 미국 캔자스시티 올레이스로 전 세계 기자들과 인플루언서를 초대했다. 35년간 가민이 남긴 발자취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더 많이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말이다.
보통 가민 캠퍼스는 삼엄한 경비가 있는 입구를 지나 들어가기 마련인데 가민은 그렇지 않다. 담벼락 따위 없이 한 동네가 가민의 본사다. 규모는 약 200만 제곱미터, 약 60만 평인데, 이 크기는 여의도 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이 안에 제품 디자인과 개발을 하는 R&D센터와 제조 공장, 물류센터, 그리고 미주 지역 창고 시설까지 있다. 캠퍼스 안에 기획부터 디자인, 개발, 제조 등 모든 과정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수직 통합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수직 통합 시스템은 창립 초기부터 가민이 추구한 사업 전략이다. 수직 통합 시스템을 활용하면 기획에서 제조 단계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돼 빠르게 시장에 제품을 출시할 수 있으며, 기술적 일관성과 퀄리티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우리가 수직 통합 시스템을 구축한 건 더 나은 제품을 만들고 고객에게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입니다. 중간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빠르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죠. 수직 통합 시스템을 위해 직원을 모두 직접 고용합니다. 판매 채널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객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위해 자체 운영을 하죠.” 운영 총괄 부사장을 맡고 있는 패트릭 드부아의 이야기다. 가민의 수직 통합 시스템은 단순히 제조에 머무르는 게 아닌 운영과 고용, 판매까지 모두 적용된다. 가민은 약 2만 명의 직원을 모두 직접 고용하고 있으며 일자리 창출에도 적극적이다. 창립 초기부터 이어져온 전통과도 같다. 이러한 가민의 노력은 자화자찬이 아니다. 2024년 포브스는 미국 최고의 기업 리스트에 가민의 이름을 두 번째 자리에 올려놓았다.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선 회사 직원들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래야 최고의 제품이 나옵니다.”
패트릭 드부아 부사장이 캠퍼스 소개와 운영 관련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나서 캠퍼스 투어 일정을 공개했는데, 참가한 기자와 인플루언서의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캠퍼스’라는 단어와 어울리게 빡빡한 수업과도 같은 투어 프로그램이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민은 그만큼 보여주고 싶은 것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을 거다. 가민의 대표 사업군인 피트니스, 아웃도어, 해양, 항공, 자동차에 대해 보고 듣는 것은 물론 테스팅 랩과 산업디자인 파트, 유통센터까지 가민의 전반적인 걸 모두 보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가민의 홍보 담당자 역시 “이렇게까지 가민에 대해 알 수 있는 ‘역대급’ 행사는 없었다”고 말할 정도니 그 기대는 배가됐다.
우리의 첫 투어는 항공 분야다. 지금의 가민을 있게 한 사업이라 첫 번째 투어로는 아주 제격이었다. 1989년 10월 가민을 창립한 게리 버렐과 민 카오는 이전 회사에서 무선통신을 활용한 항공기용 통합 내비게이션 시스템을 개발한 경험을 바탕으로, 소형 민간 항공기를 위한 GPS 내비게이션을 가민의 첫 사업 아이템으로 잡았다. 걸프전 이후 미군이 기존 군사용 GPS 기기 대신 가민 제품을 쓰면서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회사는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현재는 항공용 내비게이션뿐 아니라 레이더 시스템, 비행기 제어 시스템, 음성 및 디지털 데이터 통신 시스템 등을 모두 갖추고 있다. 조종사 교육용 소형 비행기부터 12~16명을 수송할 수 있는 중형 비즈니스 제트기까지 다양한 항공기에 장착된다. 가민에게 항공 관련 시장은 아주 중요하다. 미국은 전 세계 비행기 운행의 70%가 이루어지고 공항도 약 4000개가 될 만큼 비행기 분야에서 거대한 시장이다.
최근 가민이 항공 분야에서 관심을 두는 건 오토랜드 기능이다. 자동차로 따지면 자율주행 기술이다. 오토랜드 기능은 소형 항공기, 특히 조종사가 한 명인 경우에 유용하다. 혼자 하늘은 날던 조종사가 갑자기 쓰러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보통 그런 상황이 오면 연료가 다 할 때까지 날다가 추락하게 된다. 그런 상황을 막고자 가민은 자신들이 보유한 항법, GPS, 레이더, 자율비행 기능 등을 통합해 오토랜드 기능을 개발했다. 버튼 하나를 누르거나 중앙 컴퓨터가 조종사의 반응이 없다고 판단하면 항공기는 자동 조종을 통해 가까운 공항으로 안전하게 되돌아간다. 현재 상업적으로도 이용하며 인증된 자율비행 시스템 중에서도 최고 수준에 속한다. 다음 날 가민에서 운영하는 에어포트를 직접 방문해 오토랜드 기능을 직접 경험해보기도 했다. 도로 위의 자율주행과 달리 비행기에서는 완전자율비행이 가능했다. 조종대에서 손을 놓은 조종사는 조수석과 뒷자리에 탄 우리를 보며 완전자율비행 과정을 설명해줬는데 기체는 불안함 하나 없이 유유히 구름 사이를 날아가고 있었다.
가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민 라이프’를 산다고 해요.
일도 열정적이지만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데 활동적인 스포츠도 필수적이죠.
딱딱한 기계적인 이야기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가민 담당자는 굳이 우리를 끌고 야외로 향했다. ‘굳이’라고 표현한 건 날씨가 흐렸고 바람 또한 세차게 불었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커다란 운동장이 보였는데 이미 그 위에서는 미식축구가 벌어지고 있었고, 인근 도로와 잔디에선 사이클을 타거나 러닝하는 사람들이 눈에 쏙쏙 들어왔다. 한쪽에서는 JL 오디오로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운동하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것 같았다. 실내도 마찬가지였다. 약 200평이 넘는 헬스장엔 무선 이어폰을 끼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으며 그 옆 농구장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가민은 직원을 위한 체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미식축구, 헬스, 농구, 요가, 골프 등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이런 프로그램 덕분인지 회사 자체의 활력이 남달랐다. “가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가민 라이프’를 산다고 해요. 일도 열정적이지만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데 활동적인 스포츠도 필수적이죠.” 본사 홍보 담당자가 운동하는 가민 직원들을 가리키며 이야기했다. 이러한 사실은 굳이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됐다. 도착한 첫날 식사할 때 가민 직원들의 신발을 우연히 볼 기회가 있었는데 대부분 나이키, 호카, 온 등 기능성 스포츠 신발을 신고 있었다.
직원들이 스포츠를 좋아해 스포츠 관련 제품 개발까지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이상적인 이야기 같지만 실제 가민에서 일어난 일이다. 가민 엔지니어 중 러닝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기존의 GPS와 디스플레이 등 핵심 기술을 활용해 러너를 위한 제품을 만들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가민 역시 항공과 해양에서 얻은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분야로 진출을 모색하면서 그들의 이해관계는 맞아떨어졌다. 그 결과 러너를 위한 최초의 웨어러블 제품 포러너(Forerunner)가 탄생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놀라운 건 또 하나 있었다. 아웃도어 관련 프레젠테이션에서 제품을 설명하던 중 ‘투르 드 프랑스’ 같은 사이클 경기 사진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이 가민 엔지니어라고 했다. 직원들의 열정과 삶의 방식이 회사의 제품 개발에서 키포인트인 셈이다.
피트니스와 아웃도어에서 가민이 중점적으로 이야기한 건 바로 배터리 기술이다. “배터리는 단순히 기술적인 사양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삶과 밀접하게 관련 있습니다. 깨어 있든 자고 있든 모든 시간대를 체크해 전체 건강 상태를 볼 수 있어야 하죠. 자신의 몸에 대한 많은 정보가 축적돼 있어야 예측도 가능한 것처럼요.” 피트니스 프레젠테이션을 맡은 담당자의 말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이런 색다름은 아웃도어 프레젠테이션 담당자의 입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배터리 수명은 길어야 합니다. 위험은 스마트워치가 작동하는 시간을 보면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언제나 작동돼야죠.” 그래서 가민은 태양광 기능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태양 에너지로만 무제한으로 작동 가능한 제품을 선보이기까지 했다. 단지 배터리 성능만으로 이뤄낸 것은 아니다. 최소한의 전력 소비를 하는 독자적인 운영체제도 크게 한몫했다.
사실 가민이 자동차 업계에 뛰어든 건 그리 최근 일이 아니다. 1990년대 후반 스트리트파일럿 시리즈 내비게이션을 출시하면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구글 지도를 탑재한 스마트폰이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현재는 주춤하는 모양새다. 이번에 눈으로 확인한 가민의 자동차 분야는 꽤 신선했다. 현장엔 BMW 최신 모델인 i7이 전시돼 있었는데 여기에 들어간 ‘도메인 컨트롤러’가 그 주인공이다. 도메인 컨트롤러는 차량 내 들어가는 슈퍼컴퓨터로 아직은 상용화되지 않은 프로토타입이다. CES 2024에서 공개된 기능으로, 각 승객 앞에 디스플레이가 달려 있어 해당 구역의 사용자 인터페이스와 영상, 사운드, 조명 등 모두 개인화할 수 있으며, 각 구역은 모두 무선으로 연결이 가능하다. 지금까지 봤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중 가장 앞서 있으며 기능적인 역할은 물론 다양한 게임과 비디오도 이용할 수 있어 엔터테인먼트 요소까지 살뜰히 챙겼다. 개발 엔지니어에 따르면 양산에 거의 다다랐고 큰 이슈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BMW에서 만날 수 있을 거다.
가민의 제품과 회사,
직원 그리고 그 안에 녹아든 문화를 보여주기 위해
조금의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8시간 동안 가민의 가치와 세계를 모두 이해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기엔 브랜드의 활동 분야나 이야기가 너무나 깊고 방대하다. 하지만 가민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걸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제품과 회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민 라이프’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들의 제품에는 고객이, 회사에는 사람이,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엔 열정이 삼각형을 이루며 지금의 굳건한 가민이라는 브랜드 구조를 만든 게 아닐까? 오직 나만의 생각은 아닐 거다. 이 자리에 함께한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그만큼 가민의 진심이 느껴졌다는 이야기다.
Contributing Editor : 김선관 | Cooperation : 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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