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김정은 만남 결과에 분노 “러시아에 본때 보여주자”…선 넘는 순간, 한국도 결단을 [매경포럼]

김병호 기자(jerome@mk.co.kr) 2024. 6. 2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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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전직 주러시아 한국 대사 3명을 포함해 대학·기관의 러시아 연구자까지 총 8명에게 북·러 밀월 속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물어봤다. 구체적으론 우크라이나에 무기 지원 시 러시아 측이 ‘대북 군사기술 지원 보복’ 운운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문제였다. 그들 모두 “직접 무기 지원은 절대 안된다. 도발할 명분만 우리가 주는 꼴”이라며 반대했다. 그나마 나아간 답변은 북한에 준 군사기술 제공 내역이 확인되면 그때 나서야 한다는 정도였다. 푸틴 방북 결과에 분개한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에 본때를 보여주자며 흥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도 무기 제공이 부메랑이 돼서 날아올까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러시아제 아우루스 승용차를 운전하는 푸틴 옆에서 김정은이 웃고 있다. 푸틴은 이 자동차를 김정은에게 선물했다. 연합뉴스
이 와중에 미국에서는 한국과의 핵공유·핵배치 주장이 터져나온다. 과거에도 없던 얘기는 아니다. 주로 공화당계 인사들이 그런 목소리를 내왔던 점에서 오는 11월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재선 시 한국 핵무장은 지금보다 유리해질 것으로 예상돼왔다. 문제는 미국이 핵을 용인한다고 해도 공짜가 아니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한국산 무기 제공이 조건으로 붙을 것이 당연하다. 장기화된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과 유럽 지원이 소진되어 가는 가운데 마지막 희망은 바로 한국이다. 이에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주고 핵을 받는 협상을 벌일 수도 있다. 대신 러시아의 대북 군사기술 지원이 가속화하고, 북한의 추가 핵실험을 부추길 우려는 커진다. 무기부터 보냈다가 핵 논의가 가라앉으면 ‘부도수표’가 될 수도 있다.
우크라戰 오판의 연속…이번엔 달라야
한가지 분명한 점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을 시작으로 우리가 적절한 판단을 못해왔다는 것이다. 설마 전쟁이 일어날까부터 전쟁 장기화로 북·러 밀월이 가속될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쟁 중에 러시아 국방장관이 포탄을 구하러 평양에 가고, 북·러 정상회담이 2년 연속 열리고, 조약에 군사 지원까지 복원될 줄 몰랐다. 안일한 판단만 하다가 뒤늦게 결과를 받아들고 옥신각신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줬을 때 비극적인 상황 전개를 감안해야 한다. 수십년간 응축된 초기술을 받은 북한이 훗날 러시아도 위협할지 모르는데 어림없다며 ‘희망 회로’만 돌려선 안된다.

푸틴이나 김정은 등 럭비공 같은 지도자를 대할 때는 보수적인 접근을 하는 게 답이다. 더욱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만이 아니라 서방 전체를 상대로 힘겨운 전쟁중이다. 한 전문가는 “국가 명운과 세계 패권을 놓고 투쟁중인 러시아는 북한이고 뭐고 가릴 처지가 아니다”고 했다. 우리가 트집 잡힐 일을 하면 비이성적 보복을 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도 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9일 금수산영빈관에서 회담이 진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0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그나마 푸틴이 한국을 나름 신경 썼다는 신호는 몇가지가 있다. 푸틴은 “한쪽이 침략당할 경우 상호 지원을 제공한다”고 말했지만 지원 앞에 ‘군사’라는 단어를 뺐다. 이로 인해 다음날 조약 전문이 공개될 때까지 정부 당국도 군사 개입은 아니라고 봤다. 전문가들도 처음엔 군사가 아닌 일반 지원으로 봤지만 결국엔 틀렸다. 푸틴의 기만술일 수 있지만 ‘군사’를 꺼내기 불편했을지 모른다. 푸틴은 김정은이 썼던 ‘동맹’이라는 표현도 안했다. 조약에는 다방면에서 협력이 적시됐지만 정작 군사기술 분야는 없다. 러시아 외무장관은 “(조약은) 순전히 방어적 성격”이라고 했다.
푸틴 訪北은 한러 관계 넘어 美 견제 차원도
푸틴 방북을 바라보는 층위에도 한·러 간에 차이가 있다. 푸틴은 하노이에서 ‘아시아 블록화’ ‘나토의 아시아 확대’를 언급했는데 이번 방북을 통해 북·러 관계를 넘어 서방에 맞서는 북·중·러 결속이라는 더 큰 그림을 염두에 뒀다. 북·러 협력을 한국 겁박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커지는 미국 영향력을 견제하는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미국 주도의 ‘쿼드(QUAD)’나 ‘오커스(AUKUS)’에 대항하는 작업 일환이다. 지난해 10월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서방이 유럽 분쟁에 이어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충돌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4월 러·중 외무장관은 “미국 주도의 나토가 아태 지역으로 영향력을 넓히는데 대항해야 한다”고 했다. 즉 푸틴 방북은 중·러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나토나 미국의 아시아 진출 우려를 불식하는 행보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북·러 밀월만 붙들고 과하다며 푸틴에게 따져봐야 ‘소귀에 경읽기’다. 어차피 우리 존재를 인식했더라도 북·중·러 연대는 서방 결속에 대항해 긴밀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이 지난 2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북한과 러시아의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 체결 관련 정부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번 일로 미국은 열받은 우리에게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내라고 부채질을 더할 것이다. 하지만 푸틴은 방북 결과를 놓고 우리가 스스로 혹은 미국 요구에 따라 무기 제공을 실행할지 시험해보려 한다. 남한테 책임을 전가하는 ‘푸틴 스타일’이다. 설마 했던 일들을 감행한 푸틴이 우리에 비수가 될 기술을 북한에 건네는 것은 일도 아니다. 장호진 국가안보실장은 23일 “러시아가 고도 정밀 무기를 북한에 준다면 우리에게 (넘지 못할) 선은 없다”며 “우리의 무기 지원은 러시아 측 하기 나름”이라고 했다. 우리 역시 러시아 태도를 봐가며 결정하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러시아 행동을 잘 감시하되 한·러가 서로 곤란해질 일은 삼가자는 논의를 병행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러시아의 선 넘는 지원이 확인되는 순간 우리도 그들이 아파할 아킬레스건을 지체없이 공략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김병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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